전반 26분, 이을용이 왼쪽에서 낮고 빠른 왼발 크로스를 쏘아 올렸다. 상대 수비수들의 시선이 설기현에게 몰리는 것을 확인한 황선홍이 비호같이 달려들었다. 골키퍼와 1대 1 상황. 뒤에서 오는 공을 확인한 황선홍은 침착하게 몸을 틀며 왼발로 감아 슛을 날렸고 상대 골키퍼 두덱은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공을 바라보며 허무하게 쓰러졌다.
월드컵 첫 승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002년 6월 4일 오후 8시 30분, 2002한일월드컵 D조 첫 경기가 열린 부산월드컵경기장은 온통 붉은 물결로 뒤덮였다. 한국의 상대는 나이지리아 국적을 포기하고 귀화한 공격수 올리사데베와 리버풀의 명 수문장 두덱이 이끄는 동유럽의 강호 폴란드였다.
기대와 달리 한국은 경기 초반 폴란드의 공세에 주도권을 빼앗겼다. 홍명보의 중거리 포로 승부의 추가 균형을 이룰 즈음 이을용의 크로스가 황선홍의 왼발로 이어지며 폴란드의 골 망이 출렁이자 전국 방방곡곡이 함성으로 뒤덮였다. 모두들 손뼉을 치며 "대~한민국" 을 외쳤고 버스와 택시들은 승리의 경적을 울려댔다.
후반 8분 승부에 쐐기를 박는 유상철의 중거리 슛이 터졌다. 임팩트가 제대로 걸린 유상철의 강 슛은 골키퍼 두덱의 손을 맞고 골대로 빨려 들어갔다. 2대 0, 한국의 완전한 승리였다.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 첫 출전해 헝가리에 0대 9, 터키에 0대 7로 패한 이래 한 번도 이뤄내지 못한 값진 승리를 무려 48년 만에 따낸 것이다. 경기를 마친 선수들은 태극기를 몸에 두르며 그라운드를 돌았고 특유의 어퍼컷 세리머니를 날리던 히딩크 감독도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16강 진출도 눈 앞에 보였다.
기적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이때까지 그 누구도 축구 변방인 한국이 4강까지 오르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과 태극전사들은 기적을 현실로 만들었다. 폴란드에 이어 미국과 무승부, 포르투갈을 1대 0으로 누르고 16강에 오른 한국은 세계 최강 이탈리아를 맞아 120여 분의 사투 끝에 안정환의 골든 골로 8강에 올랐다. 스페인과는 접전 끝에 0대 0으로 비겼고 승부차기를 통해 5골을 모두 성공시키며 마침내 4강 신화를 이뤄냈다. 체력이 고갈된 한국은 독일에 분패해 결승에 오르진 못했지만 이미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것이다.
온 국민이 붉은 옷을 입고 한마음 되어 축제에 휩싸였던 그날이 그리워진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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