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역사학자 이언 모리스생물학·사회학·지리학 넘나들며1만6000년의 역사 꿰뚫어독창적 분석틀 '사회발전 지수'동서양 문명 비교·분석경쾌한 필력, 방대한 분량 극복케
1848년 영국은 청의 속국으로 편입되고,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은 베이징으로 끌려간다. 앨버트 공은 자금성이라는 호사스러운 감옥에서 변발을 하고 중국 경전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며 여생을 보내다 죽는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 빅토리아 여왕은 난방도 잘 안 되는 싸늘한 버킹엄 궁전의 내실에서 세상과 접촉을 끊은 채 1901년 국장도 치르지 못하고 중국 제국 이전 시대의 마지막 유물로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원제 'Why The West Rules-For Now')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픽션이다. 역사는 정반대로 영국이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후 중국을 지배하고,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군 장교들이 베이징의 궁전에서 약탈한 강아지 루티를 기르며 동양을 자신의 발 밑에 두었다.
탁월한 고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이언 모리스(사진) 스탠퍼드대 교수가 쓴 이 책은 서양이 왜 동양보다 앞섰는지를 고찰하기 위해 동서양의 구분이 의미를 지니기 전인 유인원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만 4,000년부터 서기 2,000년까지의 역사를 꿰뚫으며 동서양 문명을 비교 분석했다.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역사학ㆍ비즈니스 스쿨 교수는 '역사의 통일장 이론'에 가장 근접한 대작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종횡무진 역사를 헤집고 다니는 풍부한 지식과 폭넓은 시야는 그야말로 대단하다. 1,000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에 기가 질릴 법하지만 독창적인 도입부에서 보듯 흥미로운 소재들과 서사로 이야기를 이끄는 경쾌한 필력으로 극복한다. 최파일씨의 유려한 번역 역시 칭찬할 만하다.
서양 패권을 말하는 선행 이론으로는 태곳적부터 서양이 늘 동양을 이겨 왔다는 장기고착이론과 우연적 사건의 결과로 서양 패권이 도래했다는 단기우연이론이 있는데, 저자는 후자의 손을 든다. 서양은 산업혁명 이후인 1,800년대에 이르러서야 동양과의 대결에서 이기며 일시적으로 앞서 나가기 시작했으며 그것조차도 우연이라는 것이다. 다만 1842년의 영국이 화력이 우세한 장갑전함을 건조하고 일찍이 발달한 제조업자들의 기술력으로 상품을 넘쳐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중국 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책에서 역사의 패턴과 문명의 법칙을 밝히기 위한 틀로 삼은 것은 크게 생물학, 사회학, 지리학이다. 저자는 그중에도 지리학이 서양의 지배에 있어 더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지리적으로 중국인보다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가 닿는 데 유리했고, 잘게 쪼개진 땅 덩어리에서 경쟁해야 했던 유럽과 달리 중앙집권적 거대 제국이 들어서 있는 중국으로서는 굳이 움직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한 사회발전 지수 역시 1800년 이전까지는 서양이 조금 우위에 선 채로 비슷하게 유지됐으나 1800년 이후 수직 상승한다.
각 장마다 통계와 고고학적 지식으로 가려낸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가 산출한 독창적인 비교 수단인 사회발전 지수를 비교해가며 동서양의 차이점을 측정하는데, 인구, 에너지 획득, 조직화와 도시성, 전쟁 수행 능력, 정보 기술 등으로 점수를 매긴다. 인류 전체의 사회발전 지수는 기술 발전 이전에는 거의 0에 수렴했으며, 현재는 900점 정도다. 2103년에는 무려 5,000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인데 저자가 제시한 그래프에 따르면 2000년과 2050년 사이에 사회 발전은 이전 1만 5000년보다 두 배나 빠르게 증가하며, 2103년이 되면 다시 두 배 더 증가한다. 그리고 그 시대의 패권은 아시아의 강국 중국이 가져갈 것이라고 조심스레 예측한다.
중국의 부상으로 미국과 유럽이 지배하는 세계 패권이 위협받고 있는 최근의 상황은 과연 동양의 시대를 열 수 있을까. 저자는 중국 중심의 체제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면서도 장밋빛 미래를 전망한다. 턱도 없는 비약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동양 인구의 증가와 잠재력, 전쟁 수행 능력의 급속한 성장, 나노 단계까지 발달한 기술 등 급변 요소는 아찔할 정도로 많다. 여기에 사회가 발전할수록 오히려 발전을 저해하는 힘을 촉발하는 '발전의 역설'과, 부족한 점에서 유리한 요소를 찾아내는 '후진성의 이점'까지 작용하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는 주장이다.
사회발전 지수에 시비를 걸자면 책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겠지만,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을 망라한 저자 나름의 문명의 법칙은 분명 탁월한 데가 있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지표를 제시하며 통사적으로 방대한 역사를 들여다 보고 있는 역작이다. 2010년 원서가 발간됐을 때 이 담대하고 독창적인 저서를 놓고 국제문제 전문지 는 "미래학에 대한 달콤한 작품 100권보다 가치 있다"고 평가했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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