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금융위기 회복기에도 소득 양극화 여전히 심화빈곤 퇴치 위해서는 뒤틀린 부자들의 논리 깨야
소득 재분배 이야기가 나올 때 부자들이 반대하며 내세우는 논리가 몇 가지 있다.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이득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그 '정당한' 이득을 더 많은 과세 등으로 불공평하게 빼앗아서는 안 된다. 부유한 계층에 이로운 제도나 일은 결코 나머지 계층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
'기회는 균등하게 줄 테니 능력껏 경쟁해 가져가라'는 철학 위에서 움직이는 미국에서는 경제 또는 기업 활동과 관련해 오랫동안 이런 부유층의 논리를 반영한 사회적인 합의가 있었다. '당신들에게 직장과 번영을 제공하는 대가로 우리가 상여금을 챙길 수 있게 해달라. 당신들 모두에게 한몫씩 나눠 주겠다. 물론 우리 몫으로 더 많이 챙길 테니 그건 이해해 주기 바란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우선 파이를 키우는 게 중요하니 조금만 더 참자"쯤 될까.
그런데 미국 사회의 그 암묵적인 합의가 적어도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서서히 붕괴되고 있다. 월가 점령 시위가 대표적인 사례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 컬럼비아대 교수의 이 책은 '1%'와 '99%'로 상징되는 미국 사회의 양극화 확대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그 양극화가 부자들의 논리와 전혀 다르게 어떻게 경제를 망가뜨리고 사회를 분열시키고 또 민주주의나 법치주의를 훼손하는지 분석했다. 분석의 토대는 전적으로 미국이지만 그대로 한국에 대입해도 틀리지 않다.
스티글리츠는 미국을 '1%의, 1%를 위한, 1%에 의한' 나라라고 진단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전 호황기에 상위 1%는 국민 소득의 65% 이상을 거머쥐었다. 2010년 미국이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때 상위 1%는 회복기에 창출된 추가 소득의 93%를 가져갔다고 한다.
이 같은 불평등을 낳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그는 '정치 시스템의 실패'를 꼽는다. 정부는 조세 정책과 사회복지 지출을 통해 소득을 재분배하거나, 법률을 통해 기업 경영진의 행동 규범과 경영자, 노동자, 주주, 채권 소유자 간의 수익 분배 방식을 통제해야 한다. 거시경제 정책이나 통화 정책, 불공정 행위 감시 등을 통해 실업과 임금의 수준도 조절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 시스템이 부유층의 관점일 경우 법률로 부유층의 이익을 제한하는 기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경제 엘리트들은 나머지 구성원을 희생시켜 자신들에게 이득을 몰아주는 법률 체계를 만드는 데 골몰할 것이다. 그 결과 예산 정책에서 통화 정책, 심지어 사법 체계까지 모든 정책 결정 과정에서 불평등이 고착화된다.
시장경제도 그냥 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시장은 엄청난 힘을 지녔지만 도덕성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책과 칼럼에서 주장해 왔듯이 스티글리츠의 결론은 그래서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적절한 규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1%'가 아닌 '99%'를 위한 규제다.
미국에서 민권운동이 거셌던 1960년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던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을 낳는 근본적인 원인들을 바로 잡을 수 있는 학문'인데다 자신의 '수학에 대한 열정'을 살릴 수 있다는 이유로 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이 책 서문에서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둔 계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공업지대인 인디애나주 게리시에서 보낸 어린시절 이야기다.
"열 살 때 나는 온종일 나를 돌봐주던 다정한 여성이 초등학교 6학년을 마지막으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분이 이처럼 부유한 나라에서 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는지, 왜 자기 아이들은 놔두고 나를 돌보고 있는 건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늘 우리 곁에 있다'는 말은 진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들이 대단히 많은 게 당연하다거나, 가난한 사람들이 대단히 고통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빈곤을 퇴치하는 데 쓸 수 있는 부와 자원을 가지고 있다."
세계적인 금융 위기 이후 최근 수년간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사회의 구조적인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책들이 적지 않게 나왔다. 이 책은 그런 책들의 '결정판'이라고 할 만하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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