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100여 년 전, 귀하의 조국인 대일본제국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아시아 연대론을 주장했지요. 그런데 그 방식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낮은 수준이었습니다. 이웃을 지배하기 위해 고작 힘을 동원하다니!
그런데 당신의 조국인 일본은 천박하고 막무가내형 인간을 그토록 많이 배출하면서도 세계 최상위 수준의 독서량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당신 나라에서 힘깨나 쓰는 자(정신대 망언이나 독도 망언 따위를 늘어놓는 기묘한 인간들 말이에요)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저조차도, 일본인들의 독서량에는 두려움을 느끼곤 합니다. 결국 책 많이 읽는 자들이 책 읽지 않는 자를 지배할 거라 여기는 것은 어찌 보면 집단지성의 힘을 믿는 합리적 판단일 테니까요.
그러나 이 편지를 당신에게 띄우는 까닭은 따로 있습니다. 그건 당신 선조들이 형편없는 방식으로 추진하다가 결국 못 이룬 대동아공영권의 꿈을 당신이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당신의 신작 소설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출판사 가운데 한 곳에서 16억 원(이건 확인된 것이 아니니 저는 믿지 않습니다만, 하도 많은 언론에서 보도한 것이라 어쩔 수 없이 인용합니다)이라는 거액의 선인세를 지불하고 출판권을 획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실 그 전에도 대한민국 독자들 사이에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것으로 조사된, 매우, 정말, 확실히, 분명 탁월한 출판사에서 (솔직히 저는 지금도 이 책의 제목을 '일큐 84'로 읽어야 하는지, '아이큐 84'로 읽어야 하는지, 아이큐가 두 자리에도 못 미치는 인간이라 잘 모릅니다)를 출간할 때도 이에 버금가는 금액을 지불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까지 당신이 이 나라 출판계에서 수금(아! 죄송합니다. 수금은 일수놀이 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인데, 이런 용어를 쓰다니!)해간 돈이 제 계산으로는 50억 원을 넘으면 넘었지 못 미치지는 못할 듯합니다. 당신이 쓴 글이라면 그게 무슨 내용이든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게 대한민국이니까요.(아무리 사재기라는 세계 유일의 마케팅 수단이 활용되는 대한민국이지만 당신 책조차 그럴 리는 없겠지요. 그러니 믿자고요)
그런데 당신의 조국에서는 그런 일이 없겠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전문서나 교양도서 한 권 출간 비용이 약 1,000만 원에 달합니다. 그런데도 그 돈이 없어서 1년에도 수백, 수천 종의 원고가 사장되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수금해 간 50억 원이면 이 나라에서는 전문서 500종을 낼 수 있는 셈이지요.
그러니 이제 당신의 업적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순진무구하게 무력을 앞세운 당신의 선조들과는 달리 대한민국에 당신의 작품을 잉태한 대일본제국의 문화를 은밀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전파하는 현대적 의미의 진출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그것도 상대 국가와 시민의 반대가 아니라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대한민국의 문화를 기록한 500종 가까운 도서의 출판을 방지하는 부대효과까지 얻었으니 이야말로 일석이조요, 놀라운 국위 선양이 아니겠습니까?
여하튼 다시 한 번 당신이 이룬 성과에 경의를 표하며 이만 글을 마칩니다.
추신: 아! 당신의 숭고한 이름을 글머리에 잘못 쓴 듯합니다. '무라까와 하루키'가 아니라 '물럿거라 하루치'더군요. 아니라고요? 그럼 알아서 하세요. 난 최선을 다했으니까.
김흥식 서해문집 대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