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국가경영전략이 경천동지할만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경험하고 있다. 성장에의 '다 걸기 전략'를 몰아내고, 성장과 분배를 함께 추구하는 쪽으로 국가전략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이 통합적으로 굴러가야 비로소 달성 가능할, 새로운 종류의 국가전략이 잉태된 것이다. 한국형 복지국가가 미증유의 운항을 개시하면서, 미쉬라 교수가 묘사했던 '통합적이고 조합주의적인' 복지국가로의 전환과제들이 일거에 제기되는 '혼돈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민생경제만은 확실히 책임지겠다며 정부 출범의 팡파르를 울린 지도 100일이 다 되어간다. 이거다 싶은 민생정책들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김정은의 핵 놀음과 세계경기의 침체 탓이라 치자. 대내외적 악재가 걷혀가는 이제라도 경제와 복지의 상생과제를 푸는 데 진력을 다해야 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될진대, 하나하나의 국정과제가 아무리 훌륭한들 큰 틀에서의 정책패키지로 꾸며줘야 피부에 와 닿는 정책화가 가능하다.
첫째, 수십 조원에 육박하는 추가적인 복지비용을 한국 자본주의의 업그레이드로 연결시켜야 한다. '복지병'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간간이 들린다고 해서 복지망국론이 필연적일 이유는 없다. 지하경제 양성화와 조세정의 확보라는 해묵은 과제들이 이제야 풀리는 이유를 보자. 복지 재원마련에서의 절박함이 견인한 일이 분명하고, 복지가 한국경제에 건전한 자극을 준 대표사례가 아닐 수 없다. 남성들만 오래 일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공부는 똑같이 시켜놓고 남성들만 일하게 하는 것은 교육투자의 반 쪽짜리 회수이며 생산성의 발목을 잡는 비효율의 극치다. 복지가 없어서 생긴 일이기에 복지 덕분에 여성고용이 늘게 되면 경제자체가 회생할 것이다. 공정한 경제로의 본격적인 체질개선과 '2만 달러 깔딱 고개'를 넘을 새로운 인적 자원이 복지로부터 나올 수 있다고 보면, 경제와 복지의 융합전략은 그 자체로 성장친화적이다.
둘째, 사회적 경제를 창조경제의 한 축으로 삼음과 동시에 이를 위한 인프라 구축부터 제대로 챙겨야 한다. 시장경제를 지원하는 것만으로는 고용률 70% 달성이 요원할 것이고, 언젠가 겪었던 IT벤처의 거품붕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선진국의 경험들을 외면하려 하지 말고, 양극화된 노동시장에서 약자그룹을 챙길 전략부터 맞춤형으로 내놔야 한다. 생협이나 사회적 기업, 마을기업이나 자활기업과 같은 소셜벤처가 활성화 되게 되면,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가치의 경제'가 시작될 것이다. 사랑과 열정을 지닌 청년, 여성, 노인들이 사회적 창조경제의 혁신가로 거듭나면, 이들의 헌신을 통해서 노동시장 약자들의 고용이 올라가고 착한 소비의 새 시대가 열릴 것이다. 복지에 풀리는 돈이 착한 보육조합이나 따뜻한 요양기업으로 흘러가게끔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높아질 사회서비스의 품질도 경제와 복지의 통합이 가져올 추가적인 이득이다.
셋째, 경제적 이익갈등을 대타협의 복지정치로 승화시켜야 한다. 남유럽처럼 선거경쟁에만 복지정치를 맡기게 되면, 복지포퓰리즘을 막아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살쇠바덴 협약이나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의 교훈에서 배울 점이 있는 것이다. 대타협의 정치 없이는 복지가 선거의 노리개로 전락할 뿐, 합리적인 복지전략의 도출이란 애당초 불가하다. 미래투자의 문제, 임금수준의 문제, 일자리나누기의 문제, 복지수준과 국민부담의 수준을 연동시키는 문제 등을 한꺼번에 타결하는 '빅딜방식'의 사회적 대타협 창출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다. 갑작스런 복지정치의 폭발에 휘둘려 장밋빛 복지공약이 난무했던 지난 선거들을 보면, 경제주체들의 이익조정을 완성하는 데만도 주어진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복지국가를 통해 한국경제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에 정치력을 집중할 절체절명의 순간이 왔다. 혼돈의 시대를 타개할 리더십을 작동시키려면 작은 것보다 큰 걸 따져야 정답이 보일 것이다.
안상훈 서울대 교수ㆍ사회정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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