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신(神)의 징벌'로 규정한 신문 칼럼 논란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글 쓴 이는 평소 유난히 과감한 글쓰기로 더러 지지를 받은 것에 스스로 취한 나머지, 역사의 비극에 언론인답지 않게 '신'을 들먹인 듯했다. 그는 일본의 항의와 논란에 "원폭 희생자와 유족에게 유감의 말씀을 드린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칼럼에서 독일 드레스덴 공습을 나란히 언급한 것에는 아무런 말이 없는 걸 보면, 진정한 반성으로 들리지 않는다.
■ 그가 칼럼에 쓴 대로 1945년 2월 드레스덴 공습은 최악의 무차별 도시 폭격으로 기록됐다. 영국 공군은 전쟁 내내 후방의 군사목표를 폭격했다. 그러나 드레스덴 공습은 전세가 완전히 기운 전쟁 말기, 일부러 도심 민간인 지역을 불바다로 만들어 단 사흘 만에 2만5,000명이 희생됐다. 바로크 문화유산을 상징하던 '엘베강변 피렌체' 드레스덴의 전통 건축물이 모두 함께 불탔다.
■ 영국이 전략 표적에서 비껴있던 드레스덴을 노린 것은 철도 중심지를 타격, 소련군이 압박해오던 동부전선의 독일군 지원을 막는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애초 민간의 삶을 파괴, 전쟁 의지를 꺾을 목적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 언론과 지식인 사회에서 '테러 폭격'의 도덕성 논란이 일었다. 의회도 떠들자 처칠 총리는 "무분별한 파괴는 잘못"이라고 책임을 공군에 미뤘다.
■ 공군 폭격기사령관 아서 해리스는 '도살자(butcher)'로 불렸다. 전후 그의 부하 장병 일부는 훈장을 거부했다. 이게 거슬린 해리스는 작위(爵位)를 거절하고 남아공에 머물렀다. 1992년 공군사령부에 해리스의 동상이 섰으나, 항의 시위 때문에 24시간 경비를 세워야 했다. 뒷날 국제민간기구 'Genocide Watch'는 히로시마와 드레스덴 폭격을 전쟁범죄로 규정했다. 문제의 칼럼 논란은 우리 사회 보수와 진보가 모두 진정한 역사의 교훈에는 무지한 채 '복수'와 '천벌' 따위를 함부로 떠드는 행태를 반성하는 계기로 삼을 만하다.
강병태 논설고문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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