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30년 전 소설이지만 절절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지금도 학교 폭력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놀이를 가장한 폭력, 카톡 폭력, 귓속말 욕설 등 정서적 괴롭힘의 건수가 더 많아졌다.
소설은 학교 폭력 장면으로 시작한다. 고등학생 유대는 학교 짱 기표가 이끄는 아이들에게 끽소리 한 번 못한 채 폭력을 당했다. 메스껍다는 이유다. 형우도 당해 입원까지 한다. 쓸데없이 간섭한다는 이유다. 형우는 유대와 달리 기표에게 대항할 방법을 모색한다. 기표가 둘러쓰고 있는 '우상'의 껍데기를 벗기는 것이다. 형우는 담임과 협력해서 기표의 뒷조사를 하여 불우한 가정 형편을 알아낸다. 기표는 맹수가 아니라 도움을 바라는 가련한 친구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덧씌운다. 기표가 누리고 있던 절대권력을 빼앗는 동시에 고립시키려는 책략이었다. 위압과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던 기표는 동정 받아 마땅한 벌레로 전락한다. 매혈까지 하게 해서 돈을 착취하던 기표의 행동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과장되고 미화되어 알려진다. 기표의 이야기는 영화화될 단계까지 이른다. 이런 공세에 기표는 무력해지고 위축되다가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는 편지를 남기고 실종된다.
기표는 문제학생의 전형이다. 학교 폭력이 성행하고 자살자가 속출하는 현대사회를 생각하면 용인되어선 안 될 존재다. 그래서 처벌의 대상이다. 형우와 담임은 언론과 선동을 이용하여 기표를 쓰러뜨린다. 그들 또한 새로운 종류의 악이 된 셈이다. 차이라면 기표는 주변 사람들을 억압하며 군림했지만, 담임과 형우는 주변 사람들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지능적 올가미라는 점이 주목된다. 사회가 가지고 있는 포장된 힘이고, 개인에게 가하는 집단적 폭력, 제도적 따돌림이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폭력보다 보이지 않는 교묘하게 위장된 호의가 더 잔인한 폭력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학교 폭력 경험은 트라우마가 된다. 정신 건강의 균형을 유지하는 뇌의 정보 처리 시스템을 붕괴시켜 치유의 과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공포, 불안, 분노, 절망감 등으로 자기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과 믿음을 갖지 못한다. 충격적인 경험 때문에 일어나는 이러한 부정적 감정들을 수용하고 충분히 표현하도록 지지해야 한다. 사이버 폭력, 언어 폭력의 피해 학생들은 문자나 전화가 오면 과민반응을 보이고 심하면 욕설이 들리는 환청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상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막고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기표는 막상 자신이 폭력의 대상이 되자 졸렬하게 변하여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고 울부짖는다. 자신만을 소중히 여기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사이코패스의 특징이다. 그래서 기표가 걱정된다. 그런데도 그저 기표를 추방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공동체를 위해서 한 명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식이다. 어디에도 교육적인 면모는 보이지 않는다. 기표는 어디선가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더 거친 폭력을 행하고 다닐지도 모른다. 교육현장의 핵심을 비껴간 논의로 학교 폭력은 근절되지 못한다.
황효숙 가천대 외래교수 , 간호사ㆍ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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