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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피해자 회한 풀어 준 '존댓말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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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피해자 회한 풀어 준 '존댓말 판결문'

입력
2013.05.29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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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로 터져 나오는 판사의 '막말'이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서울중앙지법의 한 재판부가 긴급조치 피해자 재심 판결문에 존댓말로 정중한 사과와 반성의 뜻을 담아 화제다. 딱딱한 예삿말로 작성하는 것이 불문율인 판결문에 존댓말이 등장한 것은 사상 처음이다.

29일 본보가 입수한 성종대(56)씨에 대한 긴급조치 9호 재심 판결문 마지막 문단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사법부가 인권의 마지막 보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큰 고통을 당한 피고인에게 사법부의 일원으로서 깊이 사과 드리고 이 사건 재심 판결이 피고인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 문단 이외에는 여타 판결문과 마찬가지로 예삿말이 쓰였다.

성씨는 성균관대 재학 중이던 1977년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뿌린 혐의로 징역 1년6월을 선고 받았으며, 2011년 2월 재심을 청구했다.

'판결문에 존댓말을 쓰면 안 된다'는 제한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긴급조치 재심은 물론 일반 판결문에서도 존댓말 표현은 찾아볼 수 없다. 판결문은 공문서인데다 재판부가 직접 피고인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재판부 판단을 객관적으로 담는다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대법원과 서울중앙지법 관계자는 "검색 시스템의 한계로 모든 판결문을 다 들여다본 것은 아니지만 존댓말이 쓰인 판결문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대법원 재판 예규 '판결서 작성방식에 관한 권장사항'에도 판결문은 쉬운 단어와 짧은 문장을 쓰고, 형식적 중복적 기재 등을 생략해 간략하게 작성해야 한다는 권장사항과 함께 예삿말로 쓰인 판결문을 예시로 들고 있다.

재판부가 관행을 깬 이유는 뭘까. 판결문을 작성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 김환수(46ㆍ사법연수원21기) 부장판사는 "판결문에 지금까지 존댓말을 한 번도 써보지 않았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며 "사과의 뜻을 아예 빼거나 예삿말로 쓸 수 있었지만 '사과한다' '기원한다'며 예삿말로 쓰는 것은 사과하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억울한 고초를 겪은 피고인들에게 사법부를 대신해 사과하는 마음을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존댓말 판결문'을 받아본 성씨는 "법원이 사과의 뜻을 흔쾌히 표명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용기를 내준 재판부에 경의를 표한다. 비록 뒤늦은 사과이지만 진정성이 느껴져 회한이 풀린다"며 반겼다.

재판부는 지난 23일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처벌 받았던 성씨 등 4명에게 무죄를 선고했으며 다른 3명의 판결문에도 존댓말을 썼다.

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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