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일본 아베 총리의 최근 행보를 비판하다 '원폭 투하가 신의 징벌'이란 취지의 칼럼을 써 구설에 올랐다. 결국 그는 일본 정계의 항의에 조그맣게 사과문을 쓰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남한 웹의 광범위한 반응을 보면 이 사건에 대해 "할 말을 했다", "속 시원하다"는 반응도 만만치 않다.
한 기자의 지적처럼 피폭민들 중엔 조선인들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조선인이 없다 해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시민들이 전쟁범죄자는 아니었다. 김 위원의 주장에 한 톨이라도 타당성이 있다면 우리는 탈레반들을 따라 9ㆍ11테러도 정당하다 말해야 한다. 미국의 원폭은 '신의 징벌'이고 미국에 대한 테러는 '신의 징벌'이 아니게 되는 건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국제정치에서의 권력관계와 친소관계에 따른 감정이입의 문제다. 그래서 미국인이나 영국인이나 프랑스인이라도 교양있는 사람들이라면 드레스덴 폭격이나 원폭 투하가 '신의 징벌'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는 못할 것이다.
김 위원의 발언은 한국인들이 흔히 분개하는 일본 극우 정치인들의 망언에 동격이거나 그 이상이다. 가령 하시모토의 '위안부 망언'에 분개하는 세계시민들이라면 김진의 발언에도 눈이 휘둥그래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발언은 한국이 일본보다 국력이 크더라도 불필요한 것이고 그렇지도 않은 상황에선 자해행위다. 일본 극우파에 힘을 실어주고 극우파 발언을 규탄하던 일본 시민과 세계 시민들을 순간적으로나마 침묵하게 하는 행위다. 그게 어떤 한국인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줬다면, 도대체 그 카타르시스란 건 왜 생겼을까?
역설적으로 한국인들은 일본 식민통치 과정의 인권유린 범죄들이 일본의 '윤리적 잘못'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을 '윤리적 잘못'이라 인지한다면 그들이 그걸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내가 같은 잘못을 범한다는 걸 용납할 수 없다. 한국인들에겐 인권유린 범죄가 아닌 식민통치 자체가 상처였고, 그들이 그 과정에서 철저히 내면화한 것은 약육강식의 논리였다. 일본인이 "강한 나라가 식민지를 만들고 침략을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냐"라고 말한다면 '망언'이 되겠지만 실제로는 한국인들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며 '잘못한 건 국력이 약한 우리'라는 정서를 체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굴절된 좌절감은 20세기 중반 이후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동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정서를 철저하게 내면화하는 것과 일본 '망언'에 분개하는 것은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이렇게 본다면 한국인의 분개의 핵심은 일본인의 '반성'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잘못한 것은 힘이 약했던 우리'라는 정서에선 '가해자의 사죄'는 가능해도 '가해자의 반성'은 가능하지 않다. 한국인의 환상 속에서 일본인은 결코 반성하지 않을 것이며, 예전보다 힘이 강해진 우리의 '눈치'를 보고 본심을 드러내지 않고 '사죄'하는 것만이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한국인이 일본인의 '망언'에 분개하는 이유는 상대방의 윤리문제에 대한 판단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발언이 '그들이 여전히 우리를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표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이다. 이 추론이 사실이 아니라면 김진 발언 따위에 대해 "그들이 우리를 무례하게 대하는데 우리가 어찌 그들에게 예의를 차린단 말인가"라고 반응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
그러면서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731이나 위안부 문제나 원폭투하 문제 같은 것들을 보편적인 인권문제가 아니라 민족과 민족 사이의 '예의'의 문제 정도로 축소시켜버린다. 한국인이 일본인의 전쟁범죄를 아무리 비난하더라도 자국의 국가폭력에 둔감해지는 원리가 그것이다. 그들에겐 일본인이 한국인을 때린 것이 문제이지 한국인이 한국인을 때린 것이 문제는 아닌 것이다.
결국 실제의 일본인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일본인보다 윤리적이고, 한국인은 일본인이 생각하는 한국인보다 비윤리적이란 게 '김진 사태'의 핵심이라 생각하면 씁쓸하기만 하다.
한윤형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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