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지휘부는 개전 초기 인민군의 남침 의지와 전력을 턱없이 과소평가한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안일하기 짝이 없었던 스미스부대(Task Force Smith)의 전선 배치를 설명할 길이 없다. 스미스부대는 6ㆍ25 전쟁 중 인민군과 최초로 접전한 미군 부대다. 태평양전쟁 후 일본 큐슈에 주둔한 미 24사단 21연대 1대대에서 차출됐다. B와 C 등 2개 보병중대와 통신소대 등을 합쳐 급조된 406명이 개전 5일만인 6월 30일 C-54 수송기에 실려 부산 수영비행장에 공수됐다.
■ 부대명은 대대장인 찰스 스미스 중령의 이름에서 땄다. 그는 태평양전쟁 최악의 격전지인 과달카날 전투에서도 대대를 이끈 지휘관이었다. 스미스부대 일반병들은 대부분 신병이었으나, 장교 30% 이상과 부사관 절반이 제2차 세계대전 전투 경험자였다니 만만찮은 전력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미군이 전선에 등장하기만 해도 인민군의 기세가 꺾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스미스부대원들은 개인 당 M1소총 1정과 실탄 120발, 기본 공용화기와 C-레이션 이틀 치만 갖고 전선에 투입됐다.
■ 경기 오산 북쪽 죽미령에 진지를 구축한 스미스부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남하하던 인민군 4사단 병력과 조우한 건 새벽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7월 5일이다. 오전 8시쯤부터 후방 포병대의 도움을 받아 진격하는 탱크를 공격했으나, 부족한 화력 탓에 허무하게 돌파 당했다. 이어 오전 11시45분부터 길이 10㎞의 대형을 이루어 진군하는 인민군에게 공격을 감행해 치열한 보병전을 벌였으나 180명 가까이 전사하는 참패를 겪었다.
■ 2개 중대병력과 1개 포병대를 합쳐 540명이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 사단병력을 상대한 오산전투는 애초부터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불퇴전의 용기만은 지금도 미군 전사(戰史)의 한자리를 빛내고 있다. 휴전 60년을 맞아 미 하원이 최근 알링턴 국립묘지에 스미스부대 영령들을 기리는 조형물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머나먼 전장에서 산화한 스미스부대원들의 고귀한 젊은 피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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