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을 흔히 '사회의 공기(公器)'라고 일컫지만, 잘못하면 '흉기'가 될 수 있다. 종합편성채널 TV조선(조선일보)과 채널A(동아일보)의 '5ㆍ18 북한 개입설' 보도 파문은 사회적 책임을 망각한 언론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흉기가 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줬다.
스스로를 철없는 '일베충'(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회원) 수준으로 격하한 보수 언론의 행태가 안쓰럽지만, 그들의 한심한 역사 인식에 앞서 먼저 따져야 할 것은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이다. 언론이 누군가의 주장을 보도할 때 취재원의 신뢰성과 주장의 근거, 그 근거의 사실 여부에 대한 검증이 전제돼야 함은 새삼 강조하는 것도 낯부끄러운 기본 중의 기본이다. 파문이 커지자 떠밀리듯 사과를 하기 전까지 이들 방송사와 프로그램 제작진은 "5ㆍ18을 왜곡, 폄훼할 뜻은 없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들은 저널리즘의 기본은커녕 자신들이 내보낸 방송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조차 몰랐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나 바보' 선언이나 다름없다.
사실 종편의 5ㆍ18 민주화운동 왜곡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채널A는 지난 1월 '뉴스와이드'를 통해 "(자신의 책에서)5ㆍ18 광주에 절대로 북한 특수군이 왔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극우 논객 지만원씨의 주장을 여과없이 내보냈다. 어디 5ㆍ18 폄훼뿐인가. 그동안 종편 채널들은 자질이 의심스러운 자칭 정치평론가, 억지주장과 기행으로 공론장에서 이미 퇴출되다시피 한 과거의 논객들을 불러내 '욕설과 막말, 궤변의 경연'을 펼치게 함으로써 값싸게 시청률을 올리려는 전략을 써 왔다. 종편 선정 당시 방송통신위원회가 내세운 명분 중 하나인 '일자리 창출'을 괴이한 방식으로 실현한 셈인데, 박근혜 정부에 씻기 어려운 오욕을 남긴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도 그 수혜그룹의 한사람이었다.
이런 비루한 생존 전략에도 불구하고 종편 사업자들이 처한 현실은 남루하기 짝이 없다. 종편이 2011년 12월 개국 이래 지난 4월까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받은 법정 제재를 살펴보면, 채널A가 시청자에 대한 사과 2회, 관계자 징계 및 경고 1회를 포함해 15건으로 가장 많고, TV조선도 관계자 징계 및 경고 1회 등 13건에 이른다. 손석희 JTBC 보도 부문 사장이 출근 첫날 부장단회의에서 강조했다는 '공정, 균형, 팩트, 품위'는 바로 '종편에 없는 네 가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품위까지 내던지고 시청률에 목을 맸지만, 채널별 평균 시청률은 고작 1% 안팎. 경영 실적은 더 초라하다. JTBC는 드라마 등에 의욕적으로 투자하며 그나마 '종합편성'의 꼴을 갖추려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지난해 당기순손실 1,326억원을 내며 딜레마에 빠졌다. 일찌감치 '보도전문' 채널로 방향을 튼 MBN이 256억원, 채널A와 TV조선도 각각 619억원, 554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그렇게 떠받들던 '시장 논리'마저 팽개친 채 정치적 계산에 따라 무더기로 사업권을 내준 이명박 정부의 무모한 실험이 낳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이경재 방통위원장도 최근 KBS '일요진단'에서 "아시다시피 정치적인 고려에 의해서 4개 채널이 한꺼번에 (탄생)했는데"라고 언급했다. 채널이 너무 많아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었지만, 2009년 국회에서의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부터 사업자 선정, 채널 배정 등 각종 특혜를 주기까지 전 과정에 '정치적 고려'가 작용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법원이 방통위에 '종편 심의 선정 당시 작성한 심사 자료 등을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이 당연한 결정을 얻기 위해 지루한 법정 싸움을 벌여야 했다는 게 어처구니없지만, 이제라도 방통위가 꼼수를 버리고 당장 관련 자료 일체를 공개할 것을 촉구한다. 더불어 내년 3월 최종 결정이 내려질 종편 재허가 심사를 철저히, 원칙에 따라 진행하기를 바란다. 이 위원장은 앞서 언급한 방송에서 "좀 더 지켜보고 종합적으로 분석해 다음 재허가 때 우리의 의지를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의지'란 말에서 '정치적 고려'에 대한 우려를 느낀 사람이 나뿐일까. 의지 따위는 필요없다. 원칙만 있으면 된다.
이희정 선임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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