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파트 단지에서 겪은 일. 여중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걷다 마주 오던 자전거에 부딪칠 뻔 했다. 순간, 아이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씨X, 놀랬잖아." 화나서 뱉은 말도 아니었다. 어투나 표정으로 보아 그냥 "어머나!" 정도의 뉘앙스였다. 아무일 없었다는 듯 무심히 옆을 지나쳐가는 아이는 귀엽고 얌전해 보이는, 딱 '범생이' 이미지였다. 아이의 분위기와 방금 들은 욕이 도무지 조합되지 않아 한참을 망연히 돌아보았다.
▲ 아마 세계 최고의 욕쟁이 국가는 단연 우리나라일 것이다. 미국에선 F로 시작하는 'four-letter-word(네 글자)' 외엔 별달리 욕이랄 게 없다. 지금도 영화 대사에 이게 한 두 마디라도 들어가면 바로 청소년 관람 제한인 R등급을 매길 만큼 사회적 관리도 엄격하다. 일본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가장 심한 욕이라는 '바카야로' '야쓰' '칙쇼'니 하는 것들은 '바보 놈' '녀석' '짐승'의 뜻이어서, 우리로 치면 욕이랄 수도 없는 것들이다.
▲ 서울 장충고 교사가 학생들이 쓰는 욕과 비속어들을 모은 책 를 펴내 화제가 됐다. '존나' '조낸'의 뜻도 모른 채 아이들이 일상으로 쓰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앞의 여학생처럼 아이들이야 몰라 그런다 해도, 문제는 소위 '일베' 등 인터넷 공간에 난무하는 욕설들이다. 견해와 입장이 다른 상대에게 쏟아내는 독한 욕들은 섬뜩한 적개심과 공격성으로 서로를 상처 내는 잔인한 무기가 된다. 이 또한 우리에게만 유난한 현상이다.
▲ 동방예의지국에서 이토록 모진 욕이 발달한 건 아이러니다. 조선 때 이미 온갖 욕이 일상화해 있던 점을 들어, 지독한 신분체제 하에서 대놓고 항거할 수 없던 상민들의 분노와 좌절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억압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것이다. 금기 많은 유교문화권이면서도 우리 욕 대부분이 성과 생식기에 관련된 것도 같은 이유다. 어떻든 욕의 본질은 공격성이다. 사회적 공격성을 낮추고 통합수준을 높이기 위해 '욕 관리' 정책이라도 생각해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준희 논설실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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