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5월 28일 어스름이 밀려오던 저녁 무렵, 구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크렘린 궁 앞 붉은 광장에 4인승 세스나기가 사뿐히 내려 앉았다. 비행 금지 구역인 이 곳을 세 번이나 선회한 후에 내려앉은 경비행기의 조종사는 놀랍게도 19세의 서독 청년 마티아스 루스트였다. 여자 친구와 함께 비행기에서 내린 그는 몰려온 인파에 휩싸여 평화 전단을 뿌리고 사인을 해주다가 KGB에 전격 연행됐다.
" 붉은 광장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아예 크렘린 궁 안으로 들어갈까 생각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든 공개적인 장소에 비행기를 내려야 했다. KGB가 두려웠다…"
소련 당국은 발칵 뒤집혔다. 서방세계의 경비행기가 다른 곳도 아닌 최고 심장부인 크렘린 궁의 귓전을 때리며 유유히 착륙했으니 군경에 비상이 걸린 것도 당연했다. 정보망과 방공망이 한꺼번에 뚫리면서 냉전시대 소련의 자존심이 일순간에 무너졌다. 1만여 개의 레이더와 요격전투기 및 지대공 미사일은 조그만 프로펠러 경비행기 앞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고향 함부르크 비행클럽에서 조종을 배운 루스트는 핀란드 헬싱키에서 모험을 시작했다. 당초 임대한 단발 세스나기로 스웨덴 스톡홀름까지 비행하겠다는 계획이었지만 이륙 20분이 지나자 교신 장비의 전원을 끄고 기수를 동쪽으로 향했다. 자신의 비행이 동서 양 진영의 평화를 위한 가교가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핀란드 교통 관제탑은 그가 추락한 것으로 추정했고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700km를 남겨두고 있었다.
저공 비행을 하던 세스나기가 소련 영공으로 들어서자 미그 23기 전투기가 바짝 다가왔다. 루스트는 긴장했지만 83년 대한항공 747기를 여객기를 격추해 국제사회에서 커다란 비난을 받았던 소련이 민간기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예상대로 미그기 조종사들은 이를 지상관제소에 스포츠항공기라고 보고했고 지상에서 진짜 비행기인지 커다란 새인지 헷갈리는 사이 루스트의 세스나기는 구름 속으로 사라진 뒤 모스크바까지 날아갔다.
19세 청년의 무모했던 비행은 나비효과를 불러왔다. 사건 이틀 만에 소콜로프 국방장관과 콜두노프 방공군총사령관이 해임됐으며 이들은 모두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개혁, 개방정책에 반대하는 군부 핵심이었다. 고르바초프는 투자를 늘려 방공망을 강화하자는 군부의 의견을 묵살하고 안보 책임을 물어 보수적인 군 간부들을 통째로 물갈이했다. 이는 결국 독일 통일 및 소련의 붕괴와 함께 냉전 시대의 종말로 이어졌다.
영공 침범 등의 혐의로 모스크바 교도소에서 14개월의 수감 생활을 마친 괴짜 청년 루스트는 영웅이 되어 귀국했지만 91년 간호실습생을 흉기로 찔러 다시 철창 신세를 지기도 했다.
2007년 워싱턴포스트와 사건 20년 특별인터뷰를 통해 냉전 종식의 계기를 제공했다고 평가 받은 그는 현재 투자자 겸 거물급 포커선수로 변신해 활동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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