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뵈러 갔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틀었다. 마침 오사카 시장 하시모토의 '위안부' 망언에 대한 뉴스가 나왔다. 불쑥 궁금증이 일었다. "할머니도 왜정 때 저런 얘기 들었어?" 시골 집성촌에서 자란 할머니는 올해 여든여섯. 일제 말에는 파릇파릇한 소녀였다.
"아유, 그럼. 어느 날 친척오빠가 처녀애들을 불러 모았어. 혼삿말 있으면 사내가 병신이래도 군소리 말고 가래. 일본에서 처녀애들 잡아간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할머니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싫어! 잡혀가면 갔지 병신한테는 절대 안 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게 쏘아붙이며 깔깔깔 그랬잖니?"
이어진 할머니의 이야기는 좀 의외였다. 흉흉한 말이 돌자 겁에 질린 어른들은 부리나케 혼사를 서둘렀단다. 그 통에 할머니도 정든 마을을 떠나 시집을 갔다. 얼마 후 만세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한 청년이 할머니를 찾아왔다.
"예전에 사실 그 사람하고 말이 오가고 있었는데, 군인으로 가야 하지 않았겠니? 다녀오면 짝을 지어주겠다고 아버지가 약속했었지. 그런데 처녀애들 잡아간다지, 전쟁 간 사람은 언제 올지 모르지, 마냥 기다릴 수 있나. 나를 벌써 다른 집으로 보냈다는 말 듣고, 한 번은 꼭 다시 보고 싶어서 먼 길 찾아왔다더라. 아이구, 얼마나 반갑던지." 반갑기만 했었을까. 나는 그때 할머니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해본다. '강제동원'의 파장이 발 밑에서 찰박거린 첫사랑의 안타까움을.
신해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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