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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고공농성'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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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고공농성'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입력
2013.05.2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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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경기 평택시 한 병원 6층 입원실에서 만난 복기성(36) 쌍용차 비정규직지회 수석부지회장은 "워낙 땅을 밟은 지 오래 돼서 적응이 잘 안 된다"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같은 날 충남 아산시 유성기업 노조 사무실에서 만난 홍종인(40) 지회장은 "아직 근육이 회복되지 않았다"며 목발을 짚고 있었다. 복씨와 홍씨는 각각 171일, 151일간 견딘 고공농성의 후유증을 겪고 있었다. 둘은 모두 농성장에 오를 때 내건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은 상황에서 건강악화로 땅에 내려와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고공농성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복씨는 "사회적 연대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고 홍씨는 "계속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고공농성 171일' 쌍용차 복기성씨■ "땅 밟는 게 아직 생소… 시민들 격려에 연대감 새삼 느꼈다"

건강은 어떤가

"내려오자마자 병원으로 왔다. 혈압이 높아 약을 먹었고 두통은 진통제를 맞았고 십이지장과 위에 염증이 있어서 치료를 하고 있고 허리는 물리치료를 받았다. 오늘은 오후에 대장 내시경 검사를 한다. 올라갈 때는 다들 건강했는데 반년 동안 땅을 한번도 밟지 못하고 열악한 조건 속에서 생활하다 보니까 몸이 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내려오는 결정은 어떻게 했나

"내려오기 이틀 전 의료진이 철탑에 올라와서 진단을 했다. 내려가서 동지들에게 건강이 심각하다고 얘기를 한 것 같다. 동료들의 논의를 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다 했다고 몸이 만신창이가 됐는데 견디는 것은 무리라고 내려오라고 권유를 했다. 그 결정을 따랐다."

결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한상균 전 지부장은 계속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나도 몸이 좋지 않았지만 세상을 등지는 사람까지 있는데 모든 걸 걸어야 하지 않나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결국 사람이 살려고 하는 것이지 않나. 살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이기 때문에 죽어선 안 된다. 24명이나 되는 쌍차 동료와 가족들이 죽어서 죽음에 대해 마음에 박혀 있는 게 크다.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다."

내려오고 나서 울었는데

"여러 가지 설움 때문에 울음이 터진 것 같다. 몸도 안 좋았고 차별 받는 비정규직 처지를 생각하면 억울하기도 했다. 또 대화조차 거부하는 회사에 대한 분노도 있었고 정부나 정치권의 모습에도 실망했다."

결국 요구조건이 관철 안됐다

"구체적 성과는 없지만 쌍차 문제에 대한 사회적 여론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종교계 학계 언론계 등 쌍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본다. 또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정치권의 행태와 대화에 나서지조차 않는 회사의 무관심을 폭로했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한진중공업 고공농성 때처럼 희망버스가 활발하지는 않았는데

"꼭 희망버스가 아니라도 괜찮다. 눈에 확 띄진 않지만 여러 곳에서 손을 잡아줬다. 지나가면서 가족들이랑 와서 힘 내라고 말해주고 여기저기서 필요한 물품들을 보내주는 것을 보면서 이런 게 사회적 연대라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 올라갈 때 171일 정도 예상을 했나

"농성 전에 아이들한테는 아빠 백 밤만 자고 오겠다고 하고 나왔다. 누가 반년이나 될 것이라고 생각했겠나."

뭐가 제일 힘들었나

"고공농성이라는 게 편해질 수가 없다. 생리현상 해결 등 최소한의 일상도 어렵다. 하지만 바람이 제일 힘들었다. 바람이 불면 천막이 날아가니까 밤새 잠도 못 자고 붙잡고 있어야 했다. 또 철탑에 15만4,000V의 고압 전류가 흐르는데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면 유리창을 긁는 것처럼 찌지직 소리가 크게 들리는데 그걸 듣는 것도 곤욕이었다."

계속 고공농성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고공농성을 하는 사람들은 땅에서 손을 흔들면서 누가 괜찮냐고 물어보면 다 괜찮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안 괜찮다.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안 힘들 수가 없다. 항상 건강에 신경 쓰고 마음도 고립되지 않게 잘 다지면서 지내길 바란다."

2003년 9월 쌍용차에 입사한 복기성씨는 비정규직이었다. 그는 "더럽고 위험한 일들은 모두 비정규직 몫이었지만 월급은 정규직의 절반밖에 받지 못했다. 갈등도 있었지만 해고 된 후에는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나 서로를 이해하고 똑같이 투쟁한다"고 말했다. 철탑에서 새해를 맞으며 소원을 빌었다는 그는 "딱 두 가지가 떠올랐다. 정규직으로 일하는 것과 일 끝나고 가족과 저녁밥 먹고 TV 보면서 웃는 일상을 되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공농성 151일' 유성기업 홍종인씨■ "목적달성 못했지만… 그러나 계속 싸울수 있는 힘 얻었다"

건강은 어떤가

"내려와서 24일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이 혈전과 다리근육이었다. 혈전 문제는 약물치료를 해서 심각한 상태는 아니다. 하지만 고공농성을 하며 제대로 다리를 펴지 못해서 근육이 다 빠지고 뼈밖에 안 남았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다가 이제 목발을 짚고 다닌다. 재활에는 3개월 정도 걸린다고 들었다."

어떻게 농성중단을 결정했나

"의사가 올라와서 진찰을 한 뒤 밑에 동지들에게 상태가 심각하다고 얘기한 것 같다. 노조에서 내려오라고 결정을 했다. 어쨌든 조직 차원에서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조직의 판단을 따르기로 했다. 농성 중 사측에서 내려와서 풀자는 전화가 왔었다. 교섭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내려온 후 특별교섭에 나갔는데 사측이 타협안을 내놓지 않았다."

내려올 때도 담담했는데

"제 상태를 알고 조합원 동지들이 많이 울었다는 얘기를 듣고 저도 눈시울이 젖었다. 내려갈 때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는데 조합원들이 다 나와서 기다리며 우는 모습을 보니까 저도 감정이 격해지더라. 그런데 119 사다리차가 고장이 나서 한 시간 동안 공중에 매달려 있는 동안 눈물이 다 말라버렸다. 기다리는 동안 감정도 많이 추스를 수 있었다."

결국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았는데

"노조 파괴 책임자 처벌, 어용노조 해산, 해고자 복직이라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중요한 성과가 있다. 현장의 투쟁력이 복원됐다. 고공농성을 시작한 후 조합원들이 하루도 안 빼고 부분파업을 계속하고 있다. 또 사측이 만든 노조에서 17명이 우리 노조로 넘어오는 등 조직력도 살아나고 있다. 사측이 관리자 50여명을 자신들이 만든 노조에 넣으면서 대표교섭노조 자리를 차지했다. 현재 우리 노조 조합원은 290명인데 사측이 만든 곳이 20명 정도 많다. 내년에는 우리 노조가 대표교섭노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유성기업 사태는 "밤잠은 좀 자면서 일하자"는 요구로 시작됐다. 주야 2교대를 주간연속 2교대로 바꾸자고 요구하며 사측과 교섭을 벌이던 유성기업 노조는 2011년 5월 부분파업을 벌였다. 그러자 회사는 바로 직장폐쇄를 하고 공권력과 용역을 동원해 파업을 진압했다. 또 제2노조도 만들었다. 사측의 잇단 조치는 노조 파괴 전문업체인 창조컨설팅의 자문에 따른 것이었다. 지난해 창조컨설팅은 부당노동행위를 지도ㆍ상담한 사실이 드러나 설립인가가 취소됐다. 하지만 유성기업 사측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목에 밧줄을 메고 있었는데

"굴다리 파이프에 묶은 밧줄을 목에 걸고 하루도 빼지 않았다. 농성장 높이가 5m로 다른 고공농성장보다 낮다. 강제로 끌려 내려오는 일을 막기 위해서 건 것이다. 내 자신의 의지를 잃지 않기 위한 부분도 있었다."

어떤 점이 힘들었나

"씻지 못하는 것과 화장실 보는 일이 어려웠다. 요강을 두고 볼 일을 보고 내려주면 밑에서 처리해줬고 물티슈로 몸을 닦아야 했다. 겨울이 지나고 조금 더우니까 몸에서 때가 밀리니까 혼자 있지만 창피했다. 조그만 움막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일어서지도 못하고 소화도 안됐다."

가족들은 어땠나

"집에는 그냥 텐트치고 농성한다고 말하고 나왔다. 처음에는 아내가 속상하다고 보러 오지 않았다. 그런데 올라온 지 며칠 안돼서 집사람이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됐다. 그런 상황에서 해고가 되니까 진짜 미안하더라. 어차피 집사람도 집에 있게 돼서 매일 도시락을 싸와서 올려줬다. 아들이 올해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졸업식도 입학식도 못 갔다. 가족에겐 미안하지만 조합원들도 또 다른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류호성기자 r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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