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천년고찰서 담은 바흐의 첼로곡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천년고찰서 담은 바흐의 첼로곡

입력
2013.05.24 12:18
0 0

때 이른 더위에 땀이 나더니 산중에 어둠이 내리자 바람이 서늘해졌다. 절집을 에워싼 산자락이 어둑시근 가라앉고, 낮 동안 재잘대던 새들도 잠이 들어 사방이 고요한데, 풀벌레 소리만 청량하다. 보름을 하루 앞둔 23일 밤 9시, 2층 누각의 처마 끝에 둥근 달이 걸리자 부드러운 첼로 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앞쪽 멀리 구강포 바다가 보이는 이 곳은 전남 강진의 천년 고찰 백련사,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녹음 현장이다. 순하게 뻗은 만덕산 자락 천연기념물 동백나무 숲에 둘러싸인 고즈넉한 절이다.

서양음악의 아버지 바흐를 절집으로 모신 것은 음반사 악당이반이다. '첼로의 성서'로 불리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1~6번)을 첼리스트 박정민(45)이 5년간 녹음하는 음반 프로젝트 중 4번의 녹음 장소로 백련사 만경루를 택했다. 클래식음악을 한옥에서 녹음해 음반을 만든 예는 전무하다. 서양에서는 오래된 교회나 성당을 활용하고 마굿간을 개조해 쓰기도 한다.

연주자 박정민은 "공연장에서 녹음할 때는 소리가 뻑뻑했는데, 여기서는 아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들린다"며 좋아했다. 만경루는 바닥에 마룻널을 깐 다섯 칸짜리 목조건물이다. 창호지 문으로 달빛과 바람, 숲의 냄새가 스며들어 첼로 소리를 감싸는 이 공간의 특별한 느낌은 흡음재를 써서 밀폐된 스튜디오에서는 전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자연 속의 스튜디오이다 보니 녹음 중에 더러 불청객이 끼어들긴 했다. 만경루 앞 연못의 황소개구리가 한 번씩 부욱북 울었다.

악당이반과 박정민의 바흐 프로젝트는 2011년 시작됐다. 올가을 음반으로 나올 이번 4번 녹음에 앞서 서울의 한 공연장에서 2번과 3번을 녹음했다. 나머지 1번과 5번은 내후년까지 녹음한다. 장소는 아직 정하지 않았는데 울림이 좋은 성당, 오래된 향교나 서원을 검토하고 있다.

악당이반은 판소리나 산조 등 우리 음악을 한옥에서 최고 음질로 녹음해 음반을 만들어 왔다. 그동안 낸 50여 종의 음반 가운데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경주 양동마을 관가정에서 녹음한 '정가악회 풍류 3집_가곡'은 한국 음반 최초로 2011년 그래미상 2개 부문(월드뮤직/기술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번 바흐 프로젝트는 악당이반이 지난해 새로 시작한 클래식음악 레이블 '오뉴월'의 두 번째 음반이다. 오뉴월의 첫 작품은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음반이다.

악당이반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SACD(수퍼오디오 CD)를 만드는 곳이다. SACD는 CD의 64배 고음질을 자랑하는, 현존 최고의 음반 포맷이다. CD 한 장에 담을 수 있는 데이터가 780~800 메가인 데 비해 SACD는 최대 19기가까지 가능하다. 정보량이 적어서 스테레오밖에 안 되는 CD와 달리 멀티 채널 서라운드 녹음이 가능하다. 그만큼 충실하게 입체 음향으로 원음을 기록할 수 있다. 이번 바흐 음반도 SACD로 만든다. 만경루에서는 마이크 7개를 써서 서라운드 녹음을 했다.

악당이반이 SACD를 고집하는 이유는 "우리 음악을 가장 좋은 그릇(음반)에 담아야 한다"는 김영일(51) 대표의 철학 때문이다. 한국 전통음악만 하다가 오뉴월 레이블을 시작한 것도 한국인 연주자의 음반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이 땅에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다. 그는 "전세계 음반 시장의 불황 속에 한국의 클래식 레이블이 거의 다 사라지면서 한국은 음반 수입 시장으로 전락했다"며 "한국의 세계적 연주자 음반도 외국에서 만들어줘야만 들을 수 있는 현실이 통탄스럽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본래 국내 최고의 사진작가 중 한 명이다. 우리 음악에 관심을 갖고 전국으로 소리를 기록하러 다니다가 전 재산을 털어 2005년 악당이반을 설립했다. 이 작은 음반사가소중한 것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묵묵히 걷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진=오미환선임기자 mh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