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서울 망우동 서울북부병원 4층 복도. 창문을 뚫고 쏟아지는 햇살 아래 화가 김태호(27)씨와 모델 전경자(74)씨가 마주 앉았다. 아직 냉방장치를 가동하지 않아 덥다고 불평을 늘어놓을 만도 하건만, 화가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모델 역시 노구를 움직이기 불편한 듯 휠체어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자폐증을 앓고 있는 화가와 뇌졸중으로 오른쪽 팔다리를 쓰지 못하는 모델은 1시간 30분이 넘도록 그렇게 각각 자신의 본분에만 충실했다.
화가 김씨는 키 183㎝에 몸무게가 100㎏에 육박하는 건장한 20대 청년이지만 말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할 수 있는 말은 "저는 김태호입니다" "안녕하세요" 정도뿐이다. 김씨의 아버지는 "네 살이 돼서도 말을 못하는 게 이상해 찾아간 병원에서 자폐증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자폐증 환자들이 흔히 그렇듯 김씨도 한 가지만큼은 천재적이었다.
어려서부터 흰 공간만 보이면 하던 낙서가 점점 형태를 잡아가고 화려한 색을 입으면서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한 번도 정규 미술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지만 3년 전 '로사이드'의 눈에 띄어 정식 작가가 됐다. 로사이드는 독자적으로 창작활동을 하는 사회적 소수자를 발굴해 세상과 소통시키는 작업을 하는 비영리예술단체다. 올 1월에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아웃사이더 아트 페어(Outsider Art Fair)'에 초청작가로 참여할 만큼 명성을 떨치고 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독창적인 그림으로, 누구보다 깊이 있게 하고 있는 셈이다.
이윽고 완성된 그림을 받아 든 전씨는 활짝 웃었다. 조금이라도 젊고 예쁘게 그려주길 바라서인지 더운데도 환자복 위에 보랏빗 테두리가 있는 파란 점퍼를 걸친 그였다. 평소 안 바르던 립스틱도 바르고 딸의 화장품도 잠시 빌렸다. 혈액투석, 재활치료 등으로 힘든 투병생활을 하고 있지만 지금만큼은 모나리자 부럽지 않다. 태어나 처음 모델을 해봤다는 전씨는 "더 많이 아프기 전에 자식들에게 남길 모습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특별한 화가가 원래 모습보다 더 예쁘게 그려줬다"며 흡족해했다.
이 병원 권용진 원장은 "23일부터 매달 둘째, 넷째 주 목요일 김태호씨가 입원 환자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로 했다"면서 "사회생활이 불편한 환자들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깨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병원은 1층 로비에서 김씨의 작품 15점도 전시한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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