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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책]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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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책]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

입력
2013.05.2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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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80)는 지난해 10월 한 프랑스 잡지 인터뷰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1959년 첫 소설집 를 시작으로 장편소설 및 소설집 31권을 정력적으로 펴내면서 조국 미국을 넘어 세계적 명성을 얻은 거장의 문학세계가 매듭지어진 것이다.

은퇴 선언 이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그는 그 결정이 마지막 작품으로 기록될 장편 (2000) 출간 직후부터 심사숙고 해 내린 결정이라고 밝혔다.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포크너, 헤밍웨이를 50년 만에 다시 읽고 나서 내 작품들을 최근작부터 하나씩 읽었습니다. (1969)에 이르렀을 때 내가 더 이상 쓸 것이 남아있지 않다고 확신했습니다. 남은 (초기작)4권은 읽을 필요가 없었지요."

로스의 문학적 성취는 전미도서상 두 번, 전미비평가협회상 두 번, 펜/포크너상 세 번에다가 퓰리처상, 펜/나보코프상, 펜/솔벨로상 등 미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을 죄다 휩쓴 수상 경력을 나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유대인이 아니었더라면 노벨문학상도 손쉽게 받았을 거라는 말도 많다.

유대계 이민 2세인 로스는 현대 미국 유대인들의 삶을 형상화하며 미국문학의 지분을 확보한 유대문학의 일원이자, 인종차별, 가족 해체, 성 억압, 계층 갈등 등 동시대 미국사회의 폐부를 가차없이 들추는 지성파 작가로서 문학적 보편성을 성취했다. 로스 자신도 "유대의 과거가 내 정신과 상상력을 풍부하게 했듯이 미국의 정치ㆍ문화적 과거도 내게 똑같이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20세기 미국 역사에 대한 그의 통찰은 (1997) (1998) (2000) 등 이른바 '미국 3부작'에 형상화됐다.

로스는 강렬한 이야기와 뛰어난 심리묘사, 통쾌한 풍자정신으로 독자들을 휘어잡는다. 자신이 를 쓰고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숨진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라고 고백()하는 미모의 아가씨를 등장시키는 식의 짓궂은 농담도 서슴지 않는다. 미국 문예지 뉴요커의 여성 비평가 클라우디아 로스 피어폰트는 "로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인물들이 너무나 완벽하게 형상화돼서 놀라곤 한다"고 말했다. 어쩌면 이는 작가의 화려한 여성편력의 소산일지도 모른다. 로스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내 인생을 소설쓰기를 위한 발판으로 삼아왔다"고 말한 적도 있다.

한국에서 로스의 작품은 1970, 80년대 등 일부 초기작이 소개됐다가 절판됐다. 그러다가 2009년부터 로스의 제2전성기(1990, 2000년대) 발표작인 이 연달아 출간되고 로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장정훈 전남대 교수가 그의 주요 작품을 주제별로 분석한 연구서를 내는 등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중 (2006)은 한 남자의 고독한 노년과 죽음을 소재로 인생과 인간심리에 대한 웅숭깊은 통찰을 표현한 수작이다. 한국어판으로 200쪽이 채 안 되는 이 소설은 (2008) (2009) 와 더불어 '네메시스 4부작'으로 일컬어진다. 네메시스는 그리스신화 속 보복의 여신. 치기 어린 격정을 누르지 못해 사지로 내몰리는 의 청년처럼 의 주인공 역시 젊은 날 함부로 발산한 욕정과 이기심의 대가로 모멸과 회한으로 가득 찬 말년을 보낸다.

피할 수 없는 생의 잔인한 복수를 로스는 과거 주인공이 딸과 나눈 심상한 대화를 통해 은밀히 암시한다. 불륜을 저지르고 두 번째 이혼을 당한 주인공은 흐느끼는 딸에게 "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해.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고 말한다. 방탕한 젊은 아비의 무책임한 충고는 그 자신이 늘그막의 비참을 견디는 지침으로 되돌아온다. 처음엔 남의 불행인 양 애틋하던 그의 인생이 점차 지켜보기에 고통스럽다가 마침내 공포스러워지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소설은 그 자체로 특별하다. 독자 수가 왜 중요하냐"고 호기롭게 되묻는 이 시대의 거장은 한 노인의 일상을 담담히 묘사하는 것만으로 늙음과 죽음에 대한 인간 본연의 불안을 들깨우는 놀라운 마술을 이 책을 통해 선사한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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