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부모가 결국 자식에게 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토록 엄혹한 세상에 묻지도 않고 내놓은 원죄 때문이라고 반세기 전 에세이스트 전혜린은 말했다. 프랑스 젊은이들의 대변자로 불리는 오늘의 소설가 마르탱 파주(38)는 여기에 하나의 이유를 덧붙인다. "나 때문에 너는 나를 잃게 되겠지. (…)언젠가 넌 내 죽음에 슬퍼하게 될 거야. 나와 네 엄마가 너를 낳았기 때문에 말이지. 너에게 이런 슬픔을 준 걸 용서해 주렴. 미안하다."(60쪽)
모든 자식은 부모로 인해 거의 필연적으로 생의 거대한 상실을 겪는다. 그 상실감의 크기는 제각각이겠으나, 열 네 살 소년에게 이미 겪은 상실의 고통과 임박한 것 같은 상실의 공포는 감당하기 버거운 것임에 틀림없다.
의 주인공 마르탱은 5년 전 엄마를 잃었다. 그 상처를 어루만져줘야 할 아버지는 '나'보다 더 제정신이 아닌 듯, 잠옷 차림으로 진료실에 나가 환자들을 돌보는 '상태가 좋지 않은' 의사가 되어 곧 떠날 사람인 양 '나'에게 세금신고서 쓰는 법, 넥타이 매는 법 따위를 가르친다. 게다가 오늘 아침엔 7년을 한결같이 비비고 핥아줌으로써 이 모든 고통을 위무해준 개가 돌연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생애 첫 사랑이 찰나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한 눈에 반해 흠모해왔던 동급생 마리가 기적처럼 내게 다가와 '너와 사귀고 싶다'고 말했고, 자연과학 시간 내내 '나'의 손을 잡고 있더니, 수업이 끝나자 돌연 '우리는 아무래도 친한 친구로 지내는 게 좋겠다'고 말한 것이다. 총 소요시간 60분. '난 사랑이 고체 상태인 줄, 말하자면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 같은 것인 줄 알았다. 이제 난 사랑이 기체라는 걸 깨달았다.'(50쪽)
이 총체적 고통의 상황에 놓인 사춘기 소년은 친구들과의 치기 어린 장난과 서툰 농담으로 고통의 농도를 낮춘다. '부적응자클럽'이라는 이름으로 뭉친 네 소년에게 농담은 우정의 가장 든든한 재료여서 실연의 상처마저 극복될 조짐이다. 마르탱은 어른들이 좀처럼 새로운 우정을 쌓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그럴듯한 가설 하나를 제시한다. 우정이란 위험 상황에서만 생성되는 것인 데 반해 어른들은 위기에 처할 일이 드물기 때문이라는 것. 전우(戰友) 외에 성인기의 새로운 친구들을 일컫는 마땅한 용어가 없는 걸 보면 맞는 말인 것도 같다.
마르탱의 아버지는 죽은 개의 무덤을 대문 앞에 만듦으로써 '죽음을 길들이려' 한다. 죽음을 일상에 물리적으로 새겨놓음으로써 죽음과 생 사이의 최단거리를 구축한 것이다. 마르탱은 무덤으로 인해 '한없이 덧없는 인간의 삶과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생명력'을 동시에 느끼며, 가족ㆍ친구들과 죽은 개를 위한 장례식 축제를 연다. 사춘기란 결국 슬픔에의 입문이며, 슬픔을 함께 겪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적실한 사랑의 정의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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