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나 발이 절단된 사람들 중 70% 이상이 실제로는 신체에 더 이상 없는 그 특정 부위가 여전히 있다고 느끼는 '환상지 증상'(phantom limb syndrome)에 시달린다고 한다. 가령 손목 아래가 잘려나간 환자라면 손 전체나 손가락의 존재감을 느끼는 식이다. 실제로는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느껴 '유령 사지(四肢)'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지극히 실제적인 증상이다. 상실한 부위가 예전에 살아있을 때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데서부터 간지러움 같은 가벼운 감각은 물론 심한 통증까지 증상의 종류도 다양하고 고통의 강도도 세다는 것이다. 환상지 증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신경심리학자들은 뇌신경계의 오작동, 혹은 손상이 있은 후 뇌가 재조직되는 과정에서 새로 자라난 신경의 부작용이라고 설명한다. 반면 당사자가 체감하기에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살과 피로 이뤄진 몸, 지금은 없는 신체의 어느 곳이 살았던 삶의 기억이다. 그 기억이 현재의 나에게 외치는 끈질긴 존재 증언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단 환상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 같은 느낌을 알고 있고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 역사가 그렇다. 과거는 어느 역사철학자의 통찰처럼 현재의 우리가 온전한 몸이 아니라 팔다리가 유실된 '토르소'처럼 전달받는 어떤 것이다. 제아무리 정확하게 기억하려고 해도 세부가 누락되고, 기록 과정에서 내용이 추려지거나 선후가 뒤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의 변이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이 변하고 역사적 해석과 가치평가가 달라지더라도 '있었던 일'이 '없는 일'이 되지는 않는다. 특히 그 일 때문에 발생한 아픔과 상처는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다. 그것은 유령 사지의 동통처럼 반복해서 현재의 우리 몸과 마음에 출몰한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이해와 서술이 변화하는 수준을 넘어, 현재의 특정 목적과 이익에 따라 역사가 변질되고 악질적으로 왜곡되기까지 할 경우 그 통증은 배가되고 상처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멀리서 예를 들 것도 없다. 최근 일본의 우경화 바람에 기세등등해진 아베 신조 일본총리나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 같은 정치권 인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내놓는 망언이 그런 악질적 왜곡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태평양전쟁과 식민지 침탈을 두고 '침략에 대한 정의는 국가 간의 관점에 따라 다르다'고 하거나 '일본군 위안부는 전쟁 상황에 필요했고 성노예는 아니다'는 망언 말이다. 그 망언들은 지나가버려서 지금은 없지만 현재도 누군가에게는 사지가 잘려나가고 몸이 타는 것 같은 고통의 과거사를 기묘하게 비틀고 궤변으로 얼기설기 엮어 사람들을 괴롭힌다. 국내에도 있다. 우리 가운데는 예의 일본인들의 망언에 분노하면서도 정작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아적이고 변태적인 언어로 조롱하고 변질시키고 왜곡하면서 한국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에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이들이 있다. 유치한 댓글로 관심을 끌어보려는 네티즌만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정신이상증세를 보이는 자칭 '애국보수' 웹사이트가 있고, 놀랍게도 공공매체인 종합편성채널도 있다. 이들에게 역사는 그렇지 않아도 토르소의 형태로 오늘에 전달된 과거를 거짓 사지로 붙였다 찢고, 괴기스런 유희로 부러뜨려 내팽개쳐도 좋은 것일까.
사람들은 때로 극심한 심적 고통을 '애간장이 녹아내린다'거나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또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잃게 됐을 때 '수족이 모두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고 하고, 삶의 중요한 원동력을 상실했을 때는 '날개가 꺾였다'는 식으로 심정을 토로한다. 그 비유들은 입에서 입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면서 고통을 누군가에게 호소하는 대화에 쓰이고 있다. 그런 말들을 하면서, 또 들으면서 우리는 타자의 고통에 공감해왔다. 허나 역사 왜곡자들의 기괴한 의식에서 자란 신경의 부작용으로 인해 사람들이 역사의 타자로 내몰리는 지금 공감은 사라지고 고통만 남았다.
강수미 미술평론가·동덕여대 회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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