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를 내 이름에 적용해 ‘before Chul Soon'으로 만들어봤자 별로 들이댈 자랑거리가 없다는 것은 며칠 전에 말한 바와 같다. 그런데 그렇게 겸손한 척하고 말해놓고 보니 영 뭔지 섭섭하고 마음에 걸린다. 그래도 뭔가 아주 하찮은 거라도 내가 이 세상에 있음으로써 달라진 게 있지 않을까? 진짜 전혀 정말로 아무것도 없나?
미국 작가 너대니얼 호손의 소설 에는 ‘어니스트라는 이 정직한 사람이 살아 있음으로 해서 세상은 나날이 조금씩 좋아졌다.’는 멋진 말이 나온다. 어니스트는 얼마나 훌륭한 인물인가? 바로 그런 식으로 “임 뭐시기가 있음으로 해서 뭔가 조금씩 좋아졌다.”고 누가 나한테 칭찬 좀 안 해주나? 빈 소리라도 누가 그렇게 말해주었으면 정말 좋겠다.
하지만 역시 아닌 건 아닌 거고 없는 건 없는 거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나는 세상에 무슨 도움이 되거나 그럴 듯한 일을 해낸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암적 존재인 것 같다. 왜 암적 존재냐구? 컴퓨터 자판을 잘못 눌러 임철순을 암철순이라고 쓰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한창 총기가 좋을 적엔 철자법을 틀리거나 맞춤법 띄어쓰기가 엉망인 사람들을 늘 비웃었다. 그런 사람들의 부주의와 무신경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후배들에게는 “자기가 쓴 기사를 왜 못 외우지? 한번 쓰면 외우는 거 아니야?(얼마나 글을 엉터리로 썼으면)” 하고 따져 묻곤 했다. 영화 한 편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잠자는 사람들을 경멸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새 제법 나이가 들고 보니 나도 걸핏하면 틀리고, 틀리고도 모르는 게 다반사가 되고 말았다. 무슨 글이든 수없이 고치고 다시 읽어보고 다듬고 하던 열의와 정성도 시들어 버리고 대충 써 넘기는 일이 많아졌다. 그런 와중에 생긴 대표적인 실수가 바로 ‘암철순’이다. 엄철순도 아니고 임찰순도 아니고 암찰순도 아니고 암철순이니 기막힌 일이다.
암이라는 글자는 한자로 이렇게 생겼다. 癌! 얼마나 완강하고 단단하고 요지부동인가? 글자의 구성부터 ?(병들어 기댈 역) 자에 바위를 뜻하는 ?(바위 암)이 결합된 것이니 불치의 병을 뜻하는 글자로는 이보다 더 적확한 걸 만들어낼 수 없을 것 같다. ?, 이게 들어간 글자 300여 개 중에서 좋은 뜻을 가진 건 療(병 고칠 요)자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잘못 쓴 암철순을 나중에야 발견하고 고쳐 쓰면서 스스로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도 갔구나, 갔어.’ 이렇게 한탄을 하면서. 그리고 ‘누구에게든 무엇에든 암적 존재는 되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는 반성과 다짐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수풀 임(林이)든 맡길 임(任)이든 임으로 시작되는 이름에 엉뚱한 심술을 부려본다. 임꺽정은 암꺽정, 임사홍은 암사홍, 임해봉은 암해봉, 임창정은 암창정, 임수경은 암수경... 이제야 조금 안심이 된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고 말하면 안 되지만, 기분을 되돌리는 데는 역시 물귀신작전이 제일이다. 아암, 암, 제일이구 말구.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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