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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풀밭으로 놀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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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풀밭으로 놀러가기

입력
2013.05.2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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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경기 가평으로 이사를 했다. 토요일이면 행락객들 때문에 차가 막혀 평일보다 출퇴근 시간이 늘었다. 지난 토요일엔 막히는 길을 피해 조금 먼 길을 선택했다. 웬만해서 안 막힌다는 그 길도 그날은 꽉 막혔다. 2차선 길이 양방향으로 막혀 있어 돌아갈 수도 없었다. 조급한 마음에 음악도 들리지 않고 시간만 보았다.

간신히 경기 남양주시 수동면으로 접어들었다. 텃밭에서 고구마를 심는 할머니가 보였다. 해가 났다 비가 오는 변덕스런 날씨였다. 아이를 업은 젊은 아낙이 우산을 받치고 있었다. 아이와 아낙과 할머니의 눈이 고구마 순에서 고구마 순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길게 구부러진 텃밭에 고구마가 심기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찐 고구마 군고구마를 상상하고 있는 동안 거북이걸음으로 차가 빠지고 있었다. 텃밭 둑에 한 무더기 토끼풀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한동안 토끼풀이 꽃을 피우는 이맘때면 차 트렁크에 돗자리를 싣고 풀밭으로 놀러가곤 했다. 수원시 외곽의 한 아파트 단지를 돌아나가는데 햇빛이 새로 난 모과나무 잎사귀마다 매달려있었다. 나는 아파트 담벼락에 차를 세우고 조그만 풀밭에 돗자리를 깔았다. 가족 단위로 더위를 피해 나온 사람들이 모과나무 아래 앉아 담소를 나눴다. 풀밭은 정리 정돈이 되어 있지 않았다. 군데군데 망초꽃이 피어 있기도 했다.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다섯이서, 아파트 단지에서 자전거를 타고 풀밭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아이들은 무성한 토끼풀 주위에 둘러앉아 돌연변이 풀잎을 찾으며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모과나무 이파리 사이에서 갈라지는 햇살이 눈을 찔러,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무슨 할 얘기가 저리도 많을까. 살아온 시간보다도 많은 걸 조잘거리는 여자아이들의 단발머리가 참 예뻐 보였다.

나는 그들의 세계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럴 엄두도 내지 못했다. 태양은 모과나무 이파리에서 몇 년의 거리를 두고 폭소를 터트렸다. 나는 태양의 높이를 짐작해보았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점차 멀어져 들리지 않았다. 네 잎 토끼풀을 찾기 위해 이동해 갔으리라. 화기를 동반한 바람이 몇 차례 불어갔고 풀밭 위로 자동차 소음이 전해졌다. 풀밭이 지진 위에 올려졌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운동장 구석에 있는 회전틀에 갇혔다. 회전틀을 돌리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든 어지러움을 참아보려고 눈을 감았다. 멈춰지지 않는 어지러움 속으로 파고든 것은, 여자아이들 중 하나가 무턱대고 던진 말이었다.

나는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은 다음에야, 아이들이 모여 있는 토끼풀 무더기 쪽을 바로 볼 수 있었다. 토끼풀은 무리를 지어 자라나 있었다. 풀밭에 무덤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아이들은 토끼풀을 꺾어 반지와 시계를 엮고 있었다. 머뭇거리다, 금방 시들어버리는 의미를 만들고 있었다. 토끼풀 무덤이 잠깐 흔들리다 제자리를 찾았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일곱 살 시절로 돌아갈 수 있어! 그 아이는 무언가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이들이 떠난 자리엔 꽃시계와 꽃반지와 꽃팔찌가 버려져 있었다. 장난삼아 만든 꽃시계와 꽃반지와 꽃팔찌가 시들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떠난 뒤 풀밭은 허허벌판처럼 황량해졌다. 마음만 먹으면 돌아갈 수 있는 시절도 그럴 자신도 없는 나는, 토끼풀 무더기를 하얗게 수놓고 있는 꽃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턴가 시간을 재서 사용하는 습관에 길들여졌다. 이제부터라도 출근시간에 딱 맞춰 출발하는 습관을 고쳐나가야겠다. 조금 일찍 서둘러나가면 일터까지 가기 전에 정거장에서 쉬듯이, 적당한 풀밭에 돗자리를 깔고 책을 읽을 수도 글을 몇 줄 옮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겠다.

이슬이 내린 풀밭으로 놀러간다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아침이다.

이윤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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