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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식의 세상만사] 협동조합이 성공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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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식의 세상만사] 협동조합이 성공하려면

입력
2013.05.22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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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동아리 선후배들끼리 협동조합으로 서점을 만들었다. 어차피 살 책을 다른 서점보다 싸게 사고, 장기적으로 자급자족 중심 경제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자는 뜻이었다. 당시 의무 출자금 3만2,000원 중 3만원은 순수 출자금이고, 나머지 2,000원은 출범 비용에 충당할 가입비였다. 30년도 넘은 옛날이니 대학생에게는 가볍지 않은 부담이었다. 서가와 진열대도 직접 만들고, 상주 점원 외에 조합원들이 번갈아 보조점원으로 비용 부담을 줄였다. 장밋빛 전망은 오래잖아 바랬다. 책 장사에도 시장 경험이 필요했고, 처음부터 목이 좋은 곳에 일정 규모 이상의 점포를 열어야 지속적으로 고객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 실패의 경험에 비추어 1980년 대 후반에 접한 스페인 몬드라곤 협동조합복합체의 성공사례는 눈부셨다. 지금도 '몬드라곤의 기적'이라고 불리고 있으니, 당시야 오죽했을까. 국내적으로는 87년 민주화를 전후한 과도기를 맞아 다양한 사회발전 모형이 활발히 논의됐고, 세계적으로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재건ㆍ재편)를 계기로 '제3의 길'에 대한 논의가 무성하던 때였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일본식 '회사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식 노동자 '자주경영(Self-Management)' 등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몬드라곤 이야기는 그야말로 꿈 같았다. 협동조합 구조로 생필품을 가공ㆍ생산하는 경공업은 물론, 대규모 자본집적이 불가결하리라 여겨졌던 기계ㆍ전자ㆍ철강 산업까지 고른 발전을 이루었다. 생산과 판매, 소비, 금융 등 모든 영역을 협동조합이 운영하고, 개인소득 격차도 최저 소득자의 수인(受忍) 범위 내로 제한됐다.

그러나 유토피아 발견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몬드라곤' 모형은 한국 현실에서 함부로 흉내 내기 어려웠다. 우선 몬드라곤의 넓이는 30.80㎢로 서울의 20분의 1, 여의도의 10배 남짓이다. 서울보다 조금 큰 싱가포르 모델조차 진지한 참고 대상이 될 수 없는 마당에 인구 2만2,000명의 소도시야 더 말할 게 없었다. 더욱이 협동조합의 핵심 토대인 공동체적 연대감은 한국 현실과는 아득했다. 몬드라곤의 공동체의식은 지리적으로 외부와 단절되기 쉬운 산악지대의 특성과 봉건제적 전통에 덧붙여 바스크 지역 공통의 피차별 의식이라는 역사문화적 요인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호세 아리스멘디 아리에타 신부의 종교적 지도력도 뺄 수 없는 요소였다. 한국은 이미 그런 조건과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몬드라곤이 던진 신선한 충격은 그렇게 식어갔다.

최근 몬드라곤이 다시 화제다. 전체 국가 발전모델로는 시사점이 약해도, 지역 정체성이 강한 산간 내륙이나 도서 지역 등의 발전 모델로는 여전히 유용해 지방자치단체의 관심이 커진 때문이다. 특히 기초단체 단위에서는 한두 개의 성공적 협동조합형 기업만 탄생해도, 그 경제 효과가 지금까지 매달려온 공기업 본사 유치보다 월등할 수 있다.

지난해 말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되고, 3월 말에는 시행령까지 말끔히 정비돼 협동조합 설립이 잇따르는 것도 한 요인이다. 이미 1,000개 가까운 협동조합 설립이 인가됐고, 신청이 밀려들고 있어 90년대 말의 정보기술(IT) 벤처 붐을 일깨운다. 영리ㆍ비영리 법인 모두 가능하고, 설립자본 규제가 없는 데다 5인 이상의 출자로 협동조합을 만들어 다양한 지원을 누릴 수 있다. 협동조합 하나 안 만들고서는 팔불출 소리를 들을 날이 머잖다.

협동조합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반갑다. 다만 현재의 협동조합 설립 붐이 과거 벤처거품처럼 허망하게 꺼지지 않으려면, 주식회사의 물적 연대와 달리 인적 연대가 토대인 협동조합의 원점을 제대로 되돌아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모든 사회적 가치를 돈으로 재려는 우리들의 텅 빈 머리를 공동체적 유대와 공생의 지향으로 새롭게 채우는 인식의 대전환, 세계관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럴 용기를 가진 사람만 협동조합 설립에 나서라.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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