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총수를 비롯한 245명이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유령법인)를 설립한 까닭은 뭘까. 과거 조세피난처는 마약, 도박 등의 은신처로 인식됐지만, 최근 들어선 다국적기업과 대기업 사주들이 탈세 목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다. 더욱이 조세피난처는 모든 금융거래의 익명성을 철저히 보장하기 때문에 기업들의 비자금 조성창구로도 활용된다. 이번에 공개된 대기업 사주 등이 역외탈세 등의 목적으로 조세피난처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22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조세피난처를 이용한 역외탈세 수법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지능화하고 있다. 기업들이 해외지사를 활용해 조세피난처에 탈세 자금을 은닉하는 게 대표적이다. 예컨대 한국 본사와 해외지사 간 거래를 조작하거나 해외투자로 얻은 이익을 손실로 위장해 조세피난처로 빼돌리는 방식 등이다.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세금을 회피하면 역외탈세가 된다.
이날 인터넷언론 뉴스타파가 조세피난처인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다고 발표한 이수영 OCI 회장의 경우 페이퍼컴퍼니와 연계된 은행 계좌로 수십 만달러의 자금을 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탈세와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CJ그룹도 버진아일랜드에 계열사를 두고 있다. 김용진 뉴스타파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대표는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뒤 그 법인 명의로 홍콩이나 뉴욕의 거대 은행에 계좌를 만들고 비밀리에 자금을 운용하는 전형적인 세금탈루 수법"이라고 설명했다.
조세피난처는 소득세와 법인세 등 세금을 일체 물리지 않거나 아주 낮은 세율로 과세하는 국가를 지칭하는 말이다. 세금을 아예 부과하지 않는 바하마, 버뮤다, 케이맨제도 등은 '조세천국(Tax Paradise)'으로, 극히 낮은 세율을 부과하는 홍콩, 파나마, 라이베리아 등은 '조세 피난처(Tax Shelter)'로 분류된다. 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스위스 등 비과세는 아니지만 특정 기업이나 사업활동에 대해 세제 혜택을 주는 나라들은 '조세 휴양지(Tax Resort)'로 불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조세피난처로 규정한 국가는 총 38개국이며, 이들 나라에 숨겨진 자산은 최소 1조7,000억달러에서 최대 11조5,000억달러로 추산된다. 인구 2만명의 버진아일랜드에는 최소 12만개의 페이퍼컴퍼니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구 1명당 여섯 개의 회사가 존재하는 셈이다.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가 아닌 정식 해외법인을 설치한 기업도 있다. 대기업 분석사이트 '재벌닷컴'에 따르면 국내 30대 재벌그룹이 조세피난처로 지목한 국가나 지역에 설립한 해외법인은 47개(2011년 기준)나 된다. 롯데그룹이 버진아일랜드, 케이맨제도 등에 13개를 둬 가장 많았고, 현대차는 케이맨제도에 투자전문회사 4개와 버진아일랜드에 부동산개발회사 1개를 소유하고 있다. 현대중공업(4개), LG(4개), 현대(4개), 삼성(3개), 한화(3개) 등도 3개 이상의 법인을 조세피난처에 갖고 있다.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 일가가 대주주인 한진도 키프로스에 판매대리업체 1개를 두고 있고, 한진중공업은 키프로스에 투자업체 1개를 소유 중이다. 조욱래 DSSL 회장 일가인 효성도 케이맨제도에 변압기 제조업체가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최근 경제민주화 바람을 타고 재벌기업들에 대한 사회적 감시가 강화되자 조세피난처를 활용한 부의 대물림 형태가 지능화ㆍ다양화하고 있다"며 "역외탈세는 사회적 의무를 회피하는 악질적인 범죄 행위인 만큼 세무조사 역량을 집중해 끝까지 추적 과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관규기자 ac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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