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63)의 얼굴엔 여유로운 웃음이 가득했다. 한 달 전 쇼케이스를 막 끝내고 대기실에서 만났을 때 긴장의 여운이 남아 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인상이었다. 19집 ‘헬로’가 한 달 만에 20만장 가까이 팔려 나가며 ‘신드롬’을 일으킨 데 대한 만족의 미소일까. “운이 좋아서 10위까지만 올라가더라도 대성공이라 생각했다”니 결과적으로 기대치를 훨씬 웃돈 셈이다. 31일부터 시작하는 전국 콘서트 투어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 ‘가왕’을 22일 서울 서초동 소속사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스튜디오엔 얼마나 자주 나오십니까.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나와요. 적게는 한 시간 반, 많게는 네 시간 정도 연습을 해요. 노래 연습도 하고 콘서트 음악 작업도 해요. 연습을 하는 건 노래를 더 잘하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저음 중음 고음 세 가지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소리를 다듬는 거죠. 가수는 여러 음역대를 확실하게 낼 수 있어야 해요. 고음을 너무 안 쓰면 달아날 수 있어요. 고음이 떨어지면 모든 힘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거든요. 고음이 맑게 또는 터프하게 나올 수 있게끔 목을 발달시켜주는 겁니다.”
-고음은 30대 시절만큼 나오나요.
“오히려 그때보다 더 많이 올라가요. 그땐 힘만 앞세워서 했는데 지금은 힘을 모으는 방법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진 않죠.”
-19집에선 절제하는 창법을 많이 쓰셨는데 이번 콘서트에도 변화가 있나요.
“예전 곡 중 빠른 템포의 곡은 변화가 거의 없지만 느린 곡은 많이 다르겠죠. 바이브레이션은 많이 제어를 했어요. 소리를 길게 끄는 걸 줄였죠. ‘창밖의 여자’도 우는 식의 창법을 다 뺐어요.”
-‘국민가수’의 자리를 되찾은 기분이 어떻습니까.
“운이 따르지 않으면 힘든 일이죠. 운과 시기, 본인의 역량 세 가지가 맞아야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저도 공감합니다. 제가 10년 만에 나온 것에 대해 대중의 호감도가 큰 작용을 했다고 봐요. 신인처럼 나온 것도 한 몫 했죠. 10, 20대나 30대 초반 중엔 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신인 가수가 히트곡을 내면 큰 호응을 받지만 기존 가수는 그렇지 않잖아요. 처음 발표했던 ‘바운스’가 요즘 노래들과 패턴이 달랐던 건 분명해요. 리듬도, 장르도, 소리도 다르죠. 이런 모든 것이 합쳐져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티저 영상 공개나 청음회, 쇼케이스 같은 프로모션 방식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이런 방식은 알고 있었지만 과연 내가 이렇게 하면 잘 될까 하는 의문이 있었어요. 용기를 낸 건 ‘헬로’에 담긴 음악이 요즘 음악과 달리 신선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부터였어요. 제가 아이돌 그룹 같은 음악을 했으면 깨졌겠죠. 팝 록으로 갔으니까 성공한 것 같아요.”
-18집이 대중적으로 큰 호응을 받지 못한 건 어떤 이유에서라고 생각하십니까.
“TV에 출연하지 않다 보니 홍보에도 한계가 있었고 음악 자체도 무거웠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그 해에 저의 운명이었던 거죠. 결국 음악이란 건 힘을 들여서 무겁게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중을 위한 음악은 쉽고 간단해야 합니다. 대중에게까지 깊게 생각하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요.”
-지난 10년간 19집을 준비하다 계속 좌초된 건 어떤 이유에서였나요.
“무리한 욕심을 내지 않았나 해요. 내 실력에도 한계를 느꼈죠. 생각이 너무 많았던 것 같아요. 음악이란 한 번에 나오면서 간단해야 하는데 음악적으로 자꾸 연관시키다 보니까 곡이 길어지고 단순하지 않게 되더군요. 누가 들어도 잘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싶다는 욕심을 내니까 더 내적인 갈등이 많았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외국 작곡가의 노래를 쓰실 생각입니까.
“저도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어떤 곡이든 ‘이거다’ 싶지 않으면 절대 안 쓸 겁니다. 누구의 곡을 쓸진 저도 몰라요. 제 역사를 만드는 것이니 제 마음에 드는 걸 해야지 억지로 할 순 없잖아요. 글로벌 시대라고 하는데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음악이라고 더 이상 한국만의 노래가 아니에요.”
-풋사랑의 설레는 감정을 다룬 곡이 많은데, 젊은 시절을 추억하며 노래하신 건가요.
“전 노래를 하며 저 자신과 전혀 연관시키지 않아요. 가사와 선율에 따라 어떤 표현이 좋은지 계속 바꿔보면서 녹음에 들어가기 전에 10번, 20번을 불러요. 그러다 보면 옛 생각하고 부를 겨를이 없어요. 고치고 또 고치는 연습 과정에서 모든 게 날아가거든요.”
-노래 가사가 전과 많이 다르다는 말을 많이들 하는데요.
“이번 앨범엔 한 곡당 가사가 최소 5개 이상이었어요. 그 중 고르고 고른 거죠. 작사가들이 곡을 쓰면 자꾸 멋있는 말, 어려운 말을 많이 쓰더군요. 시적인 가사가 많이 와요. 제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거든요. 이전에 제가 가사에 집중했던 곡들은 그럴 필요가 있던 곡들이었어요. 이번엔 쉽고 가벼운 쪽으로 가려고 했어요. 선율과 어울리는 가사여야죠. 청바지를 입었는데 나비넥타이를 매게 하는 같아요. 선율도, 리듬도, 가사도 서로 어울려야 해요. 시적인 가사를 넣으면 그 무게 때문에 노래가 튀지 못 해요.”
-감정을 과장해서 넣는 R&B 풍의 가요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감정을 세게 담아서 부른 노래는 자꾸 들으면 싫증이 나게 마련입니다. 반대로 조금 모자라게 부르면 더 듣고 싶어져요. 그걸 다 계산해서 감정을 넣는 거죠. 그래서 내 나름대로 노래하는 스타일에서 싫증이 나지 않게끔 만들려고 했어요. 전 되도록 정박자를 지키려고 해요. 멋 부리지 않고 교과서적으로 하려 하죠. R&B 창법은 유행이라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어떤 건 너무 슬픈 감정이 강해요. 제 음악에선, 음악이란 부르는 사람이 슬퍼하면 안 되고 듣는 사람이 슬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예전엔 그렇게 불렀죠. 지금 들으면 닭살 돋지만….(웃음) 그땐 정서가 그랬으니까요.”
-이번 앨범에 대해 젊은 취향을 겨냥해서 만들었다는 말이 많습니다.
“젊은 층을 위해 만든 음악이 절대 아닙니다. 평소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한 것일 뿐이죠. 젊은 게 어떤 건가요. 이번 앨범엔 신시사이저를 많이 넣지도 않았고 통기타와 드럼, 건반, 화음을 넣었는데 젊은 사람도 나이든 사람도 좋아해요.”
-‘조용필이 가벼워졌다’는 얘기도 있는데요.
“이번 곡들이 오히려 예전 곡들보다 더 무거워졌습니다. 가볍게 들리긴 해도 그 속에 들어가 있는 걸 보면 엄청나요. 화음만 해도 예전 곡들보다 더 힘들게 작업했지만 이젠 화음이 잘 들리게 하지 않고 받쳐 주는 방식으로 쓰기 때문에 잘 알지 못 하는 겁니다. 악기나 화음이나 예전보다 세 배는 더 많이 썼어요.”
-TV 광고 섭외도 거절하신다면서요.
“TV엔 안 나가고 콘서트만 하겠다고 했는데 광고에 출연하면 그게 다 무너지는 겁니다. 어떻게든 내 음악을 들을 수 있는데 꼭 TV에 나가서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요즘은 많이 좋아졌지만 예전엔 TV에서 노래하면 소리가 엉망으로 나왔어요. 드럼 소리는 나오지도 않고 베이스 소리도 거의 안 나오고. 그게 싫어서 안 나가는 겁니다.”
-조용필의 음악에서 핵심은 무엇입니까. 전통가요 스타일을 원하는 팬들도 많은데요.
“가장 처음 영향을 받은 음악, 좋아했던 음악이 평생 갑니다. 제가 어렸을 때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듣고 기타를 치고 싶어서 연주를 시작했어요. 그게 미국 팝음악이에요. 처음 산 음반이 아마 벤처스의 앨범이었고 그 다음에 비틀스, 솔 장르 가수들의 앨범을 사서 들었어요. 지금 왜 이런 음악을 하냐고 묻는다면, 어렸을 때 좋아했던 것으로 돌아간 것뿐이에요. 이번엔 많이 가지 않았지만, 아마 다음 앨범에선 더 나갈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추구했던 게 팝이었어요. ‘창밖의 여자’나 ‘그 겨울의 찻집’ 같은 노래만 듣던 사람이 19집을 듣고 ‘이건 뭐야’ 할 수 있지만 그건 그 사람의 잣대로 보는 겁니다. 그런 노래는 다시 나오기 힘들 것 같아요.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른 거니까요.”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어떤 걸 하고 싶습니까.
“늘 차로만 다녀서 그런지 별로 길거리를 걸어 다녀 보지 못 했어요. 그래서 외국에 가면 배낭 매고 걸어 다녀요. TV에 나가지 않으니 어린 친구들이 저를 못 알아 보는데 그게 너무 좋아요.”
-음악 외에 어떤 일에서 즐거움을 찾으십니까.
“없어요. 예전엔 가끔 골프를 치기도 했는데 안 한 지 오래 됐어요. 술도 요샌 거의 안 마셔요.”
-인터뷰에서 외롭지 않다고 하셨는데 혼자 사시는 게 적적하지 않습니까.
“외롭다는 건 무슨 기준으로 말하는 건지 되묻고 싶습니다. 저도 인간인데 외롭지 않을 순 없죠. 하지만 간단해요. 외롭지 않다고 생각하면 외롭지 않은 겁니다. 외로움이나 고독은 자신이 스스로 만드는 겁니다.”
-그래도 자녀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진 않나요.
“그런 생각이 들진 하죠. 그런데 재주가 없어서….(웃음) 그저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답이 딱 나와요.”
-조용필의 음악으로 만드는 오페라도 기획 중이라 들었는데 어떻게 진행 중입니까.
“대본이 우선이기 때문에 지금 여러 작가로부터 대본을 받고 있어요. 기왕 하려면 잘해야 하니까 좋은 작품을 받아서 결정해야죠. 대본이 결정된 후부터 4, 5년은 걸려야 완성될 것 같습니다.”
-20집 준비는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곡을 받아서 듣고 있어요. 요 며칠 사이에만 열일곱 곡 정도 들은 것 같아요. 아직은 마음에 드는 게 없네요. 19집과 비슷하게 나올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팝적인 강도는 19집보다 더 세지 않을까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미국이나 유럽 음악보다 더 좋게 만들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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