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만명의 초고속 인터넷 사용자들의 동의도 없이 부가서비스에 가입시켜 월 3,300원씩 모두 27억원을 뜯어간 일당이 적발되었다. 이들이 사용한 수법은 무료체험서비스에 가입하도록 한뒤 별도의 해지신청을 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유료로 전환된다는 약정이었고, 소비자들이 인터넷 요금 청구서 세부 항목을 잘 확인하지 않는다는 허점을 파고든 것이다. 대기업인 초고속 인터넷 회사가 어련히 잘 알아서 청구할까 하고 믿고 있었던 소비자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그런데 이런 엉터리 청구가 과연 이번 경우만일까. 우리나라의 평균적인 소비자들이 매달마다 주기적으로 내야하는 각종 요금만도 휴대폰, 인터넷, 케이블방송 혹은 위성방송, 전기, 가스, 상하수도, 아파트 관리비 등이 있다. 이런 요금들은 제대로 산정되어 고지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참여하고 있는 소비자단체에 얼마전 접수된 민원의 예를 보자. A씨의 아들은 현재 군대에 가 있고 집에는 인터넷을 쓰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전화요금인줄로만 알고 매달 꼬박꼬박 내왔던 6,600원이 알고 보니 군대간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때 가입했던 PC통신을 통한 강의 요금이었다는 것이다. PC통신이 한물 가면서 접속하지 않은지가 벌써 7~8년도 넘었는데도 그 긴 기간동안 계속 요금을 내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A씨는 어떻게 해서 PC통신요금을 그렇게 오랫동안 내왔을까. 그 PC통신 회사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인수되어 이름에 대기업의 이름이 붙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A씨는 마침 대기업인 모텔레콤에서 판매하는 인터넷과 집전화 상품에도 가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과 집전화 요금 중 일부인 것으로만 알았다는 것이다. 황당하기 그지 없는 사건이다.
열 네 살짜리 초등학교 6학년이 가입한 PC통신 강의요금이 그 초등생이 다 자라 스무 살이 훌쩍 넘어 군대에 간 때에까지 계속 부과되었다면 그 수강계약의 유효기간이 대체 몇 년이었다는 것일까.
모든 계약에는 계약의 유효기간이 필수적으로 정해지게 되어 있다. 아주 예외적으로 계약기간의 정함이 따로 없는 계약이 있기도 하지만 그런 계약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야 하고 계약 당사자가 계약기간이 정하지 않은 데에 따른 불이익을 당할 위험이 없어야 한다. 만일 당사자 한쪽이 계약해지를 별도 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갱신된다는 약관이 있더라도 그러한 약관은 약관규제법에 위반되어 무효가 된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내가 체결한 휴대폰, 인터넷, 케이블TV, 집전화 등의 계약기간이 얼마인지 기억나는가. 기억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계약에는 계약기간이 없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국민이 한번쯤 체결하는 계약에 계약기간이 없다는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다. 의무약정기간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의무적으로 계약을 유지해야 하는 기간일 뿐 그 기간이 끝난다고 해서 계약자체가 종료되는 것은 아니다.
전기, 수도, 가스, 아파트 관리 등의 계약은 이사를 하면 요금을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러한 계약의 유효기간은 '당사자가 그 집에 사는 동안'으로 보아도 별 문제없다. 하지만 각종 통신계약은 이사를 하더라도 계속 따라다니기 때문에 따로 계약기간을 정하지 않는 한 별도의 해지통보도 없다면 평생가는 계약이 될 수 있다. 군대에 간 사람에게 부과된 통신요금의 예에서 보듯이 가입자가 사망을 한 후까지도 요금이 부과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런 계약에 계약기간을 정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 것일까. 계약기간이 없으면 계속 요금을 청구할 수 있으므로 당연히 통신회사에 이익이 되는 것이다. 통신사가 실제 사용실적이 없는 사용자로부터 받는 요금이 얼마나 되는지는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통신대기업들이 스스로 그러한 낙전수입을 공개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무엇보다 근본적으로는 각종 통신계약에 의무적으로 1년 또는 2년의 계약기간을 정하고 갱신을 위해서는 별도의 동의를 받도록 해야 유령계약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장진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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