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3일 아침.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 한 통. "TV 보셨어? 방금 노대통령이 자살…" 황급히 TV를 켰다.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어. 뭔가 잘못 되었을 거야…'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오후 늦게 도착한 봉하마을. 마을은 벌써 사람으로 덮여 있었다. 울음소리, 살려 내라는 고함소리. 때마침 버스에서 내린 민주당 지도부가 무슨 행진을 하듯 사람들 사이를 몰려 지나갔다. 순간 사람들이 물병을 던지고 욕을 했다. "여기가 어딘데 나타나." 세상이 뒤집어 진 것 같았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부터 하루걸러 서울을 오갔다. 서울에 차려진 정부분향소 일 때문이었다. 차 안에서의 시간이 많아서였을까. 차츰 정신이 들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끝없이 이어지는 조문객, 이들은 누구인가? 꽃 한 송이 놓기 위해 따가운 햇살 속에서, 또 쏟아지는 빗속에서 몇 시간씩 줄을 서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죽음 바로 직전의 비판과 비난, 그리고 그 싸늘한 눈길들. 이들은 모두 같은 사람들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인가?
언뜻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살아서 영웅이 될 수 없는 나라! 그래, 이 나라의 지도자는 살아서 영웅이 될 수 없다. 오랜 권위주의 문화 탓인가. 지도자와 권력에 대한 요구와 기대가 너무 크다. 반면 5년 단임에 당정분리, 정부보다 더 크게 자란 시민사회와 시장 등 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은 과거 같지 않다. 결국 일은 쉽지 않고 요구와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뀐다.
여기에 부정(否定)의 정치가 파고든다. 잘해서 지지를 얻는 정치가 아니라 상대에 대한 분노를 일으켜 반사이익을 보는 정치이다. 이런 정치에 국민적 기대를 채워주지 못한 대통령은 그야말로 '밥'이다. 노대통령은 그렇지 않아도 언론과의 관계도 나빴다. 야당은 물론 여당 일부까지도 한껏 비난하고 조롱했다. 그가 중히 여기던 꿈과 가치는 그냥 그 속에 묻히고 말았다.
그의 돌연한 죽음이 있고나서야 지지자들은 다시 그를 보게 되었다. 지나친 기대와 그로 인한 원망, 그리고 부정의 정치가 드리운 안개를 넘어 그가 가졌던 미완의 꿈과 가치를 다시 본 것이다. 안타깝고 민망한 마음이었으리라. 따가운 햇볕과 빗속에서도 몇 시간을 서 있을 정도로.
그로부터 4년. 그래서 얼마나 변했을까? 그를 힘들게 했던 환경이나 구조에 대한 논의가 잘 이루어지고 있을까? 부정의 정치는 사라지고 그가 중히 여겼던 꿈과 가치가 미래비전과 정책대안으로 살아나고 있을까? 그 긴 조문행렬이나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수를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보듯 미래담론이나 정책담론의 수준은 여전히 바닥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기고 난 뒤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느 쪽도 분명치 않았다. 그저 '모이자', '이기자'는 구호와 이기기 위한 '구도' 이야기만 있었다. 그를 힘들게 했던 환경이나 구조의 문제도 제대로 거론되지 않았다. 이 역시 내가 하면 잘 하고, 네가 하면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뿐이었다.
부정의 정치는 오히려 더 크게 자랐다. 한 쪽은 그의 이름으로 분노를 일으키고 그의 이름으로 지지를 구한다. 이에 뒤질세라 또 다른 한 쪽은 여전히 그의 꿈과 가치를 폄하하고 왜곡한다.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그가 '다시 죽기를' 바라기도 한다.
이제 그를 부정의 정치로부터 풀어주어야 한다. 그의 이름으로 분노를 일으키지도 말고 그의 이름으로 이기려 하지도 말아야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그의 인생과 죽음을 왜곡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를 두려워하지도, 그가 '다시 죽기를' 바라지도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인권과 평화, 분권과 자율, 다양성과 개방성 등 그가 소중히 여겼던 가치들과 이러한 가치들을 통해 만들고자 했던 세상이 우리 모두의 마음에 닿게 해야 한다. 4주기를 하루 앞둔 오늘, 그의 죽음을 다시 생각한다.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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