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설을 며칠 앞두고 있던 1월 16일 70세가 넘은 이치우 노인이 경남 밀양 자신의 논 앞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노인은 7년째 이어오던 송전탑 반대투쟁 끝에 두 달반 동안 새벽부터 밤까지 공사현장인 산꼭대기까지 오르내리며 맨몸으로 공사를 막았다. 그 날은 철탑부지로 정해진 자신의 논에 중장비가 들어오고 용역들이 하루 종일 으르렁댔는데, 그들은 내일 또 온다고 했다. 결국 그 날 저녁 노인은 마을회관 앞에서 온몸에 기름을 붓고 자기 논 가까이 가서 라이터 불을 붙였다. 노인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이치우 노인의 죽음으로 7년여를 버텨온 밀양 노인들의 외로운 싸움이 세상에 알려졌고, 젊은이들도 합류하면서 싸움은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작년 6월 한국전력은 노인들에게 공사 방해를 이유로 10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한전으로서는 익숙한 매뉴얼대로 한 행동이었겠지만, 노인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이 때 할머니들이 "현명하신 재판장님께" 써 보냈던 탄원서는 널리 읽혔다. 할머니들은 "조용히 살고 싶읍니다. 이 할매는 욕심 없읍니다. 오직 요대로 살다가 죽도록 해주십시요."라고 썼다. 보통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하면 주민들이 대부분 물러서는데 밀양 노인들은 달랐고, 그들은 힘겨운 싸움을 계속했다. 그런데 지난 15일 한전은 8개월 만에 밀양 송전탑건설을 재개하겠다고 했다. 또 다른 충돌이 있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밀양 송전탑 건설의 배후에는 신고리 핵발전소 3-6호기가 있다. 영남권은 전력자립도가 190%가 넘는다. 한전 계획대로라면 밀양 5개 면에 평균 높이 100m인 송전탑 69기가 500~600m 간격으로 세워지고 765kV 초고압 송전선이 이어져 신고리 핵발전소 3-6호기로부터 수도권까지 전력을 수송할 것이다. 사람들은 전력예비율, 전력생산량이라는 수치 뒤에 그 전기가 수백㎞를 달려오면서 얼마나 많은 곳을 폐허로 만드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환경단체들은 밀양 송전탑 문제의 밑바닥에는 우리 정부가 추진해온 공급중심 에너지정책, 원거리 대량수송 중심의 전력정책이 깔려 있다고 말한다. 송전탑이라든가 지역주민에 대한 배려 없이 우선 핵발전소 건설을 밀어붙이는 것은 4대강 사업, 용산재개발에서 보아왔던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실제로 핵발전소 건설 역시 거대한 토목공사이고, 대형 건설업체들의 이해관계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김종철 발행인은 핵 발전과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는 이유 세 가지를 명쾌하게 말했다. 첫째 핵 발전은 대도시 주민의 전력공급을 위해 농촌과 시골벽지 주민들을 희생시킨다. 둘째 핵발전소 건설과 유지는 방사능에 노출된 가난한 일용직 하청노동자의 목숨을 건 희생을 담보로 한다. 셋째 사용 후에도 치명적인 고농도 방사능을 수만 년 이상 배출하는 핵폐기물을 미래로 떠넘김으로써 핵 발전은 현세대의 안락을 위해 미래세대를 희생시킨다. 핵 발전이 내포하는 이 세 가지 희생, 내지는 차별은 사실상 핵 발전이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 원전 하청노동자의 건강을 위한 시민모임' 발기인이자 그 자신이 원전 하청노동자인 비라르는 경제발전이나 생활의 편리함과 쾌적함, 국가안보를 위해 핵 발전이 불가결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실제 병에 걸린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것이 당신들이 바라는 것인가,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이것이 필요한가 묻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불행을 요구하는 것이 정말 민주주의인가 그는 묻고 있는 것이다.
허먼 멜빌은 "우리는 문명화된 몸을 가지고 있지만 야만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결국 자본주의 물질문명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돌아가는 것이고, 이에 대해 무감각하고 모르는 척하는 것이야말로 '부르주아의 냉혹함'이다. 그리고 더 이상 모른다고 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데도, '순진무구함'이 사망선고를 받은 지 오래인데도 모르는 척, 자신은 순진무구하다고 하는 사람은 사실은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박경미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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