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개국을 혁명이라고 한다. 이는 단순하게 왕조의 성씨가 바뀐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성계의 혁명은 정치 사회 문화 경제에 대한 전반적인 변화였다. 귀족제도가 붕괴했고, 동아시아의 정치적 변화에 순응하였으며, 엘리트들의 생활을 바꾼 일이었다. 아마도 조선이 이룬 혁명과 비견할 수 있는 것은 러시아 혁명 밖에 없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도 전시대의 문화가 계속 이어져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조선혁명의 전격을 따라오지 못한다. 그리고 이 혁명의 기획자가 정도전이고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성리학이었다는 것은 혁명 이후 500년 간의 조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로 작용한다.
고려의 귀족은 장원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 경제적 기반을 꾸려 나가면서 문화적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다. 그 전모를 살필 수 있는 유적들이 거의 사라진 지금, 확실하게 끈을 잡을 수는 없지만, 고려 불화의 화려함으로 당시의 수준을 짐작할 수는 있다. 독립적인 사병조직과 그 조직을 움직여 세운 공으로 인정받은(고려의 귀족은 대부분 이미 일정한 토지를 확보하고 있는 토호세력들이었다) 농토를 바탕으로 고려의 귀족은 화려한 장원문화를 이룩했다. 그 문화의 미학적 형식을 제공한 것이 불교다. 어떤 경제적 부도 미학적 형식이 없이 문화를 이룰 수 없다. 미학적으로 일체의 형식을 거부하는 선불교 역시 역설적이게도 그 화려한 형식미 안에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장식이 아니라 장엄이라고 부른다. '장엄하다'는 한국어에 있어서 어떤 특정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이기도 하다. 꾸미고 덧붙이는 '장식'이 아니라 '장엄'이라고 한 것은 장식의 목적과 그 목적에 다가가기 위한 형식, 즉 일반적인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장엄'이든 '장식'이든 모든 꾸미고 덧붙이는 행위에는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는 방식이 개입된다. 선불교도 꾸미고 덧붙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안에 있었고, 이슬람의 아라베스크 문양도 역시 금기 안에서 인간의 꾸미고 덧붙이는 욕망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모든 장식은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더 덧붙일 것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이 해소되는 상태를 경험한다. 우리가 고려사회를 바라볼 때 필요한 것이 이것이다.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는 문란한 것처럼 보이지만, 고려사회의 자유로운 남녀관계 근친애 동성애 등은 고려미술의 화려함을 낳은 사회적 기반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성리학 이데올로그들은 이 기반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인간의 욕망보다 인간의 이성을 우위에 두는 새로운 질서로 고려사회를 개혁하려 한 것이다. 어떤 혁명이든 인간의 욕망을 개혁하려 한 적은 성리학 혁명 이전에는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성리학 혁명이 성공하고, 500년 동안이나 지속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다.
성리학 혁명은 인간의 욕망을 고려사회처럼 자유롭게 풀어 놓거나, 이슬람처럼 금기 안에서 행하지 않고, 인간의 이성을 욕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성과 욕망을 대립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다. 끝없이 더 좋은 것을 탐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그것을 여러 가지 정황으로 자제하는 것이 이성이다. 성리학 이데올로그들은 이 이성을 인간의 욕망이 추구하는 것으로 만든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성리학에서 욕망은 본능을 포함하지 않는다. 먹고 자고 싸는 것은 욕구다. 욕망은 충족되지 않지만 욕구는 해결될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이 무엇을 추구하는가?' 하는 것이다. 선진유학에서 본능은 천성(天性)이라는 말로 간단히 인정해버린다. 그것은 하늘이 준 것이다. 성리학과 선진유학이 문제 삼는 것은 욕망이다. 충족되지 않는 것을 추구함으로써 벌어지는 욕망의 문제들을 성리학은 추구의 방향을 돌려버림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그 방향이 이성이다. 장식의 욕구를 인정하면서 그 추구를 이성으로 돌려버린 것이다. 당연히 여기에도 추구하는 목적이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격(格)'이다. 격은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하지 않다'는 것이다. 조선의 집은 이 격을 추구하면서 '스스로 그러한' 풍경을 만들었다. 근대 이성은 이 검소와 누추, 화려와 사치의 상호작용을 끊고, 모더니즘을 만들었다. 창백한 이성을 만든 것이다.
함성호 시인ㆍ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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