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지도부와 무소속 안철수 의원이 18일 5ㆍ18 광주민주화 운동 33주년을 맞아 나란히 광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을(乙)을 위한 광주선언'과 기득권 정치 청산을 골자로 하는 '광주 구상'을 발표했다. 양측은 공히 자신의 정치적 자양분으로 '광주 정신'을 강조하면서 각자 민생정치와 정치개혁을 화두로 내세웠다. 야권 주도권 경쟁에 나선 양측이 선명한 캐치프레이즈로 본격 대결을 시작한 모양새다. 각기 다른 프레임으로 야권의 새판을 짜겠다는 이른바 '프레임 전쟁'의 신호탄이 야권 텃밭에서 오른 셈이다.
민주당은 최근 당명 앞에 '을(乙)을 위한'이란 수식어를 붙였다. 사회 전반에 만연돼 있는 갑을(甲乙)관행을 양지로 끌어내고 이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인 을을 대변하는 정당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이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구현이란 큰 과제도 결국은 실질적인 민생입법ㆍ생활정치를 통해 을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는 인식과 맥이 닿아 있다.
민주당이 지향하는 '을의 정당'은 16일 발표된 '을을 위한 민주당 광주 선언'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됐다. 당시 민주당은 선언문에서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은 이제 을의 존엄을 지키는 민생정치와 복지국가 구현으로 계승되고 승화돼야 한다"면서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민생입법에 적극 매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을의 민주당'은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이 표방한 '중산층ㆍ서민의 정당', 지난해 대선의 슬로건이었던 '99%의 정당'의 연장선이면서 동시에 차별점도 뚜렷하다. 민병두 전략홍보본부장은 "현대사회에선 누구나 을이 될 수 있고 때로는 갑 안에도 을이 존재한다"며 "다소 대립적ㆍ분열적이었던 이전의 프레임과는 달리 다수의 시민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울분과 억울함을 적극 담아내기 위한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김한길 대표 체제가 '을'을 부각시키는 데에는 무소속 안철수 의원을 의식한 측면도 크다. 남양유업 사태 등에 따른 이른바 '갑질'에 대한 공분을 적극 반영한 것이긴 하지만 '새정치'를 명분으로 야권 새판짜기에 나선 안 의원을 견제하는 동시에 비교우위를 내세우기 위한 프레임의 성격이 짙은 것이다. 전병헌 원내대표가 6월 임시국회를 "을의 눈물을 닦는 국회"로 규정한 것은 새정치 구호와 127명 의원들의 민생입법 활동을 대비시킴으로써 어느 쪽이 더 국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꾸는 정치를 하는지 보여주겠다는 의미다. 정치개혁이나 정당쇄신 방안을 둘러싼 추상적인 경쟁으로 가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의 평가는 일단 긍정적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출자총액제한제 재도입이나 금산분리 강화, 순환출자 금지 등 난해하고 진부했던 슬로건을 넘어 경제민주화의 내포를 심화하고 외연을 확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도 "갑을관행을 해소하기 위한 대책을 체계적으로 구체화해 제시한다면 대중의 신뢰 회복도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안 의원에 대한 견제구의 성격이 두드러질 경우 역풍을 맞을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한 정치평론가는 "광주정신의 지나친 강조는 자칫 호남 민심을 붙들어두려는 정략으로 비칠 수 있다"며 "민주당의 과제는 안 의원의 세력화를 막거나 견제하는 게 아니라 '안철수 현상'을 적극 수용해 환골탈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부에서는 민주당이 시대정신을 선도하는 새로운 슬로건을 내세우지 못하고 '남양유업 사태' 등 외부 이슈에 편승했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광주 출신 한 의원은 "을을 위한 광주선언이 나왔지만 지역민심은 여전히 싸늘하다"고 전했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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