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차 전업극작가 박새봄(40)씨는 서울의 한 옥탑방에 산다. 그가 얼마 전 작은 상자에 흙을 채워 풀씨 몇 개를 뿌려뒀던 모양이다. 간간이 물주고 볕 좋은 자리 챙겨주며 새싹을 기다리던 어느 날, 건물주인 할머니가 그 상자를 옥상 구석으로 치워버린 일이 생겼다. 짐작건대, 옥상을 세준 건 아니라는 게 할머니의 계산. 하지만 박씨는 물러서지 않았다. 치우면 내오고, 내놓으면 치우고…, 상자를 둘러싼 말 없는 신경전이 시작됐다.
지난 15일, 씨앗들은 그 눈칫밥에도 주눅들지 않고 파란 새싹들을 돋워냈다. 그날 박씨는 사진과 함께 이런 감격(?)의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꿋꿋하게, 싹 났다. '할매!요 났으요!'" 글로 마음으로 응원하던 팔로워들도 함께 감격했다. 그 날 박씨는 이런 혼잣말로 트위터를 맺었다. "싫든 좋든 당신은 이제 옥상의 빈 공간과 빨랫줄과 햇빛을 나와 나눠 써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될 겁니다."
자칭 '극텍스트 생산노동자'인 박씨는, 요즘 본업 못지않게 '예술인 소셜유니온'설립에 마음을 쓰고 있다. 문화예술 분야 종사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누리기 위해 한 데 뭉치려는 것이다. '지 좋아서 예술하면서 돈까지 바라는 것은 억지'라는 사회의 편견에 맞서고, 관행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착취구조에 저항하고,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예술인복지법'이 이름값을 하도록 힘쓰겠다는 것이다. 홍대 인디 음악인들의 뮤지션유니온, 중견 만화가 모임인 한국만화연합 등도 같은 취지로 각개약진 중이다.
16일 오후 영화진흥위원회가 영화업계와 시나리오 표준계약서 이행 협약을 체결했다. 표준계약서는 저작권 등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준거 계약서. 영진위는 이 표준계약서를 공정위원회 표준약관으로 신청, 불공정 계약 피해를 구제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키로 했다. 영화계의 불공정 관행 개선에는 2004년 결성된 영화산업노조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스태프들의 처우에 대해 끈질기게 문제제기하며 개선을 요구해왔다. 앞서 지난 4월 16일에는 CJ CGV와 노조, 영진위가 참여해 영화 스태프 처우개선과 사회보장 확대 등을 이행한다는 노사정 협약식을 갖기도 했다.
영화계의 사정이 다른 분야와 같지는 않다. 아니 업계 사정도, 종사자들의 활동 여건도 많이 다르다. 하지만 "예술가도 노동자다"라는 선언에 동의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그들의 권리가, 빈 옥상의 햇볕처럼, 수월하게 얻어지진 않을 거라는 우려도 있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원장은 "실직자이자 극빈자인 작가 조앤 롤링이 몇 년 동안 집필에 몰두해 해리포터를 쓸 수 있었던 것도 복지라는 사회안전망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예술은 배고픈 것'이라는 우리의 후진적 인식이 예술인에 대한 제도적 보호를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정지용기자 cdragon2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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