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국광 껍질 정말 타개졌는데 '타개지다'라는 말 어디론가 사라지고 내 생애의 껍질로 들어섰다.// 저물녘 아이 부르는 소리 들렸다, 아직 날이 어두워지지 않았는데 어두워지는, 한, 오십년 전 골목, 어머니.'('국광(國光)과 정전(停電)'전문)
이 시를 쓴 사람은 김정환(59)이다. 알다시피 그는 문학 역사 음악 미술 등 문화예술의 전방위를 가로지르는 포식의 예술가다. 창작과 번역을 넘나들며 100권 이상의 책을 냈다.
3년 만에 낸 새 시집 는 그런데 조금 낯설다. 김정환 특유의 해박과 다변과 통찰의 방법론은 여전한데, 이 방법론을 지배한 테마가 죽음이다. 시인은 '나는 늙지 않았다. 한 달을 채 못 넘기고 또/ 부고를 받는 나이에 달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반세기 넘는 생애를 거치는 동안 왕년의 사과 '국광'은 더 이상 재배되지 않는 품종이 됐고, 손이 트듯 껍데기가 터진다는 뜻의 '타개지다'라는 말도 사라져 버렸다. 오십 년은 너무 멀어서,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던 어머니의 젊었던 목소리는 어둠 속으로 말소된 기억이기 쉽겠는데, 기어이 북극을 찾아 바늘을 돌리는 나침반처럼 사유의 촉이 죽음으로 향하는 시인에게는 그 저물녘이 도리어 환한 낮이고 이제가 정전의 어둠 속이다. 이 도치된 시제의 원근법이 두렵고도 슬프다.
시인은 말한다. '죽음은 지방자치다'('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 중). 어떤 막강한 중앙도 죽음을 통제할 수 없다. 죽음은 개체에게도, 집단에게도 한결같이 산발적이다. 온갖 사물과 곤충과 동물과 사자(死者)들이 일인칭의 서정적 자아가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이 방대하고 묵직한 시집 안에서 '죽음이란 살아온 생 거슬러/ 걸어가는 것'('선물과 명작')이자 '끔찍을 겨우겨우 달랜 결과'('다시 읽는 ' 중)다.
시집에는 시의 주요 제재로 그의 수많은 친구들이 등장한다. 그 중 제일은 단연 시인 황인숙이다. 존재의 품격으로 옥탑방의 위엄을 증거하며 남녀노소 수다한 시인들의 뮤즈가 된 황이 몸져 누웠던 날을 그와 함께 했던 여행과 대비시킨 시다. 제목은 '황인숙 중부식자재 할인마트 가격'. 시인은 '친구들 몇이서 그러나 단연 황인숙과 놀러 갔던' 그 여행을 황이 마트에서 장을 봤던 영수증의 상품 세목들로 즐겁고도 생생하게 재현하다가 '황인숙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던 때를 떠올린다. '까마득한 혼비백산의 당혹을 서둘러 수습'했던 시인은 '먼 훗날일수록 문득/ 더 가슴 아픈 기억 있다'며 황인숙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부른다.
시를 다 읽었다고 책장을 덮진 마시라. 책 끝머리에 달린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해설이 또 뭉클하다. '이 시집에서 독서를 안내하는 두 개념은 음악과 디자인인데, 그 밑바닥에는 늘 죽음 같은 어둠이 있고, 그때마다 시인 그 자신의 죽음이 일종의 구원처럼, 아니 가장 신뢰해야 할 전망처럼 암시된다'고 분석하던 그가 해설의 반절을 넘어서며 마치 항복이라도 하듯 돌연 '정환에게'로 시작하는 진솔하고도 애정 어린 편지를 쓴다.
''국광과 정전', 그 짧은 시, 참 좋다. 네가 가끔 이런 시를 쓸 때는 내가 좀 당황한다. 나는 늘 네가 강철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는 작은 일에도 눈물 글썽이고 하찮은 일에 치를 떠는데, 나보다 아홉 살이나 적은 너는 늘 입 다물고 담담하지.' 그리고 황현산은 마음 주머니라도 뒤집어 보여주듯 후배 사랑을 토로하고 말았다. '내가 늙는 것은 괜찮아도 네가 늙은 것은 슬프다'고.
김정환은 황인숙을 염려하고 황현산은 김정환을 걱정한다. '폭설의 아내, 안팎과 그 후'의 한 구절처럼 '걱정이 생의 영역 아니라 생이 걱정의 영역인 것처럼/ 걱정은 밀려온다.' '노년은 가장 명징한 수난'이라는 시인의 말은 아마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고달픈 생의 와중에서 누군가의 걱정을 받는 삶이란 얼마나 따스하고 벅찬 것인가.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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