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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책]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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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책]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입력
2013.05.17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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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의 묘미는 막판 반전이다. 숨겨져 있던 사건의 이면과 의외의 범인, 그것을 밝혀내는 명탐정의 추리력에 무릎을 치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작가의 트릭에 뒤통수 맞은 기분도 없지 않다. 작가가 짜놓은 교묘한 그물망에 갇혀 속았다는 느낌도 드는 것이다. 물론 이는 유쾌하게 기만 당한 것이겠지만, 그렇더라도 독자가 작가의 뒤통수를 칠 수는 없을까.

파리 8대학 프랑스문학 교수인 바야르는 이런 유쾌한 게임에 우리를 초대한다. 그는 작가의 분신격인 명탐정의 수사결과를 뒤집어 새로운 범인을 밝혀 작가의 뒤통수를 때린다. 작가가 몰랐던, 혹은 작가가 은폐한 범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작가의 텍스트 안에서 생생하게 입증하는 것이다. 반전은 작가만의 특권이 아니다.

그 첫 작업이 1998년 발표된 이다. 2009년 국내에 번역 소개된 이 책은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의 유명 작품인 (1926년)을 겨냥한다. 잘 알려져 있듯, 이 작품은 추리소설의 관습을 깨는 기막힌 반전으로 애거서 크리스티를 단숨에 유명작가로 만들었다.

막판에 드러난 범인은 놀랍게도 바로 사건을 서술하는 화자, 제임스 셰퍼드 박사다. 탐정 푸아로의 조력자로서 사건 해결을 돕는 그는 결코 범인으로 지목될 수 없는 인물로 보였다. 이를테면 셜록 홈즈의 활약을 기록하는 화자 존 왓슨 박사가 범인으로 밝혀진 셈. 이는 화자가 범인일 수 없다는 추리소설의 암묵적 규칙을 깨는 반전이어서 당시 속임수라는 논란도 적지 않았다. 어찌됐든 독자들은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것인데, 바야르는 이 충격적 반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재수사에 나선다. 과연 셰퍼드 박사가 진짜 범인일까.

을 읽은 독자라면 이 물음이 황당해 보일지 모른다. 셰퍼드 박사는 스스로 범인임을 시인하고 목숨을 끊지 않았나. 도대체 다른 범인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 바야르의 책을 읽고 나면 여지 없지 깨진다. 바야르가 현미경을 들고 텍스트의 미세한 균열점을 찾아내고, 탐정 푸아로의 추리를 하나 하나 논박하는 과정은 또 따른 추리 소설에 가깝다. 바야르는 이 작업을 '추리 비평'이라 부른다.

바야르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추리소설에서 사용한 다양한 진실 은폐 기법을 규명하는데, 그 중 에서 중요한 것은 '생략에 의한 거짓말'이다. 화자인 셰퍼드 박사가 표면상 거짓을 전달한 것은 없지만, 사건의 생략을 통해서 진실을 은폐했다는 것이다. 바야르는 이를 근거로 소설에서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 생략된 부분을 재조사하면서 사건의 윤곽을 새롭게 재구성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다른 작품들까지 근거 자료로 활용되고 정신분석학 등의 이론도 동원된다.

마침내 바야르가 진범을 잡아내는 결말 부분에선 오싹한 기분마저 든다. 똑 같은 텍스트가 새로운 의미로 탈바꿈할 뿐만 아니라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무의식까지 들춰지기 때문이다. 이 결론에 따르면 은 탐정 푸아로가 범인을 밝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망상에 사로잡혀 셰퍼드 박사를 자살로 몰고 가는 범죄 이야기가 된다. 푸아로는 진범과의 대결에서 완전히 농락당한 것이다.

어찌 보면 이 대결은 바야르와 애거서 크리스티 간의 머리싸움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독자가 텍스트에 개입해 작가와 게임을 벌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 책은 생생하게 보여준다. 여기엔 문학텍스트는 작가 고유의 것이 아니며 독자가 개입해야 완성할 수 있는 열린 의미체계란 뜻이 함축돼 있다. 독자의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독해를 요청하는 것이다. 조심해야할 것은 바야르의 재독해 역시도 완성된 진실은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의 해석에 집착할 때 푸아로의 경우처럼 또 다른 망상으로 흐를 수 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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