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이런 물건이 다 있어! 좌우지 장장, 주구장장 이렇게 내 아들과 계속 살거니?"
"이십 원짜리도 안 되는 거한테 쩔쩔 맸던 거 생각하면 내가 억울해."
시청률 30%를 기록 중인 MBC 주말드라마 '백년의 유산'에 나오는 시어머니 방영자의 대사는 하나같이 독하고 모질다. 가난한 집 출신 며느리를 구박해 이혼시키고 재벌가 딸인 새 며느리를 얻지만 실속이 없어지자 그마저도 내쫓으려 하는 인물이다. 미움 사기 딱 좋은 역이지만, 많은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말한다. 배우 박원숙(64)의 빼어난 연기 덕분이다.
15일 서울 상암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손사래부터 쳤다. "에구 양념이죠. 출연진 면면이 화려해 나한테 올 대사도 별로 없겠다 싶어 맡았는데, 세상에 웬 걸요, 이건 완전히 '방여사전'이지 뭐에요. 1회부터 20회까지 극의 흐름을 끌고 가느라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어요."
청바지 차림으로 소녀처럼 미소 짓는 그에게서 표독한 방영자의 얼굴은 찾기 어려웠다. "눈 치켜 뜨는 것부터 몸짓까지 리얼하고 그로테스크하게 연기했어요. 그랬더니 어머니는 '너무 무섭게 좀 하지 말아라'하시고 여동생 남편은 '처형은 꼭 저 역을 해야 하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이야기가 한 소큼 끓고 난 뒤 방영자의 인간적 허술함을 보여주는 데 주력했어요."
덕분에 방영자는 미워할 수만은 없는 악역으로 거듭났지만 캐릭터에 대한 그의 평가는 냉정했다. "방영자요? 없어져야 할 인간이에요. 순간의 이익과 자기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잖아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방영자처럼 병든 사람이 참 많은 것 같아요." 방영자의 운명에 대해서는 "나이아가라 폭포 쪽으로 스스로 걸어가고 있다"고 귀띔했다.
극중 뛰어난 연기가 고된 시집살이 체험에서 나오는 게 아니냐는 추측에 대해 그는 "시어머니가 무용가 출신으로 워낙 인텔리셔서 시집살이 해본 적이 없다"며 "저도 며느리 시집살이 시켜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박원숙은 매년 2, 3편 이상의 드라마에 출연하며 철 없는 부잣집 엄마('빛과 그림자' '커피프린스 1호점')부터 아들에 집착하며 며느리를 괴롭히는 광적인 시어머니('겨울새'), 늦사랑에 빠진 귀여운 여교수('그대 그리고 나') 등 다양한 얼굴로 시청자들을 만나 왔다. 그중 가장 기억에 가장 남는 작품은 7년 동안 출연했던 MBC '한 지붕 세 가족'과 KBS '토지'다.
" '한 지붕 세 가족'의 순돌이 엄마는 제가 연기한 인물 중 가장 행복한 캐릭터였던 것 같아요. 경제적으로는 부족하지만 가족이 주는 행복을 다 누리는 여자니까요. '토지'의 임이네 역은 제가 참 많은 걸 불살랐던 캐릭터죠."
연기 외에 그의 삶은 더러 굴곡이 있었다. 특히 10년 전 교통사고로 먼저 보낸 외아들은 지금도 가슴에 품고 산다. "울려고 해도 울음도 나오지 않았죠. 시간이 가고 비슷한 일을 겪은 분들을 돕는 일을 하면서 슬픔이 조금씩 줄어들었어요. '우리 모두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다. 단 일부는 침대칸을 타고 일찍 갈 수도 있다'는 말이 위안이 되더라고요."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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