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만 셋이다. 아내를 포함해서 여자 네 명과 사는 나를 부러워(?)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나름대로 청일점인 가족 구성원으로서 고충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냉장고 안의 마지막 음료를 내가 먹었더라도 안 마셨다고 거짓말을 할 수가 있고, 늦은 밤 끓여먹은 라면냄비를 설거지하지 않았어도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지만, 화장실 변기커버를 올려 놓은 건 내가 아니라고 도저히 말할 수가 없다. 달콤한 낮잠을 자는 어느 휴일 오후 갑자기 내 어깨를 흔드는 둘째의 손길에 놀라서 깼다. 둘째는 내가 올려 놓은 변기커버를 자기는 절대 만질 수 없다며 원인제공을 한 아빠가 다시 원위치 시켜놓으라고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난 아예 앉아서 용변을 보게 되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내 오른손은 휴일만 되면 마비상태였다. 어느 분이 개발했는지(진심으로 그를 미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도화지에 그려놓은 '종이인형'을 딸 셋이 다 들고 와서는 가위로 오려달라는 거다. 휴일 내내 그 종이인형을 가위질하다 보면 오른손은 펼 수도 없는 상태로 접어든다, 게다가 공주들의 레이스는 가위로 오려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특히 여왕관은 자칫 잘못하면 보석이 떨어질 수도 있어 완전히 집중해야만 오릴 수 있었다. 등에 땀이 맺혔다. 그래도 내가 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에 그저 참고 참고 오려주었다. 인형놀이가 시들해지자 아이들은 고무줄 놀이에 매달렸다. 난 시도때도없이 딸들에게 불려나가 미끄럼틀 한 기둥에 고무줄을 묶고 나머지 한쪽을 잡은 채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를 몇십 번이고 불러주어야만 했다. 어릴 때 고무줄을 끊어는 보았지만 내가 고무줄놀이를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큰딸 작은딸은 대학생이 되었고 막내도 고등학생이 되었다. 어렸을 때에는 언니가 입던 옷이나 신발을 아무 불평 없이 신고 입었던 둘째와 셋째에게 지금은 언니 옷을 물려 입는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 되었다. 휴대폰도 각자, 컴퓨터도 각자, 신발, 옷도 모두 자기만의 개성을 가지고 각자 사달라고 한다. 누구 하나라도 불평등한 일이 생기면 정말 난리가 난다. 이거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리고 난 여자들은 싸울 때 얌전하게 말로 다투거나 조금 지나쳐도 꼬집는 수준으로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어떤 액션배우들보다 더 과격하고 터프하게, 거의 와이어액션을 방불케 하는 난타전을 벌이는 걸 딸을 키우면서 처음 알았다. 그리고 난 모든 여자들이 잘 씻고, 조금만 먹고, 정리정돈도 잘하고, 행동도 모두 차분한 줄 알았다. 그러나 딸들을 키우면서 여자들이 얼마나 많이 먹고, 지저분하고, 거친지 새삼새삼 깨닫는다.
몇 년 전 큰 딸이 자기 남자친구를 소개해주었다. 딸의 남자친구에게 저녁을 사주는 자리에서 딸은 음식도 조금만 먹고 말도 조신하고 얌전하게 하는 모습을 보고는 '딸의 남자친구는 우리 딸의 실제모습을 알기나 하는 걸까'하는 생각에 그 친구가 안타깝고 애처롭기까지 했다. '야 이놈아, 네가 보는 모습이 실제가 아니란다! 네가 내 딸의 실제모습을 알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앞에서 큰 딸이 눈을 부라리고 있어서 차마 이야기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터프하고 거칠기만 하던 딸들이 며칠 전 어버이날 아침 식탁을 차리고, 엄마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아르바이트 한 돈을 모아서 저녁에는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엄마에게 감사를 표하는걸 보고는 '그래 이 맛에 자식을 키우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들만 생각하는 딸들이라고 여겼는데, 그래도 고생하는 엄마에게 사랑 담긴 선물과 마음을 전하는걸 보고는 가슴속 깊이 짠하고 기특한 감정이 들었다. 그리고 아빠로서 행복한 건 대학생이 된 두 딸과 마시는 맥주가 너무나 맛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딸들과 간단한 안주를 만들어서 병을 부딪치며 마시는 맥주는, 세상 어떤 누구와 마시는 맥주보다 시원하고 맛나다는 걸 새삼 느낀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한가지 의문이 든다. 내가 버는 돈의 90% 이상을 딸과 아내가 쓰는데 왜 그들은 나에게 화를 낼까, 그리고 왜 나는 아무 말도 못할까? 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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