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 113명 참여신달자 회장 "역사적 평가보다 왜 그런 일 했을까 생각 취지""시인협회상 1회 수상 김수영… 어용단체 상 받았다 땅을 칠 듯"젊은 시인들 성토 들끓어
'당신은 날이 갈수록 빛나는 전설입니다./ 잘 살아 보자고 외치던 카랑카랑한 목소리,/ 위풍당당 자신감이 넘치던 형형한 눈빛,/ 아무도 못 말리던 그 집념, 그 믿음과 비전은/ 언제까지나 꺼지지 않을 우리의 횃불입니다.'(시 '박정희')
한국시인협회(회장 신달자)가 시로 쓴 '한국 근대 인물사'를 표방하며 펴낸 시집 (민음사 발행)이 논란에 휩싸였다. 시집에 이승만ㆍ박정희 전 대통령 등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들을 미화한 시들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시인협회가 기획한 이 시집은 113명의 시인이 각각 한 편씩 근대사의 주요 인물들에 대해 쓴 시를 모아 13일 발간됐다.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각 분야에서 한국 근대사의 주요 인물로 기록된 이들이 우리 역사에 남긴 빛과 그늘을 문학의 눈으로 살펴보자는 것이 기획 의도. 참여 시인 명단에는 신달자 회장을 비롯해 김남조 정호승 장석남 문태준 조정권 천양희 장석주 문정희 김기택 박형준 등 대표적인 시인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
대상 인물은 시인협회 회장단이 선정했다. 종으로는 흥선대원군 김구 김소월부터 전태일 김득구(권투선수) 이태석(신부)까지, 횡으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좌우를 망라하고 있다. 신달자 회장은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보다는 시를 통해 그 인물이 그 시대에 왜 그런 일을 했을까를 생각해보자는 게 당초 취지였다"며 "역사가 다채로운 인물들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인물들을 포함시켰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시집에는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등 첨예한 논란의 중심에 있는 역사적 인물과 이병철 전 삼성 회장,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등 재계의 인물들을 영웅화하거나 일방적으로 공적만 언급한 시들이 일부 수록돼 있다.
이태수 시인이 쓴 시 '박정희'에는 '오로지 국가 장래 생각뿐이었던 당신은/ 위대한 지도자요, 탁월한 선지자였습니다./ 5ㆍ16은 쿠데타로 잉태해 혁명으로, 개발 독재는 애국 독재로 승화됐습니다.'라는 구절이 포함돼 있다. 시는 '유신으로 자유와 인권을 밀어 놓은 채 / 숭고한 희생자들을 낳기도 했습니다'라는 구절로 이어지다가 '5ㆍ16 쿠데타와 유신 독재가 없었다면 / 민족중흥과 경제 발전은 과연 어떻게 됐을는지요. /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 누가 뭐래도 당신은 빛나는 전설, 꺼지지 않는 횃불입니다'로 마무리된다.
이길원 시인은 시 '이승만'에서 '주린 배 뼛속까지 스미던 가난 속 의무교육은/ 높은 문맹률 단숨에 말리고/ 민주주의 자유 시장 경제 초석은/ 잘 살아 보자며 고속도로 깔던 힘의 원천.' '진보라는 가면을 쓴 붉은 얼굴들이 마음껏 설치는/ 넘치고 넘친 자유가 오히려 불안한/ 오늘/ 6ㆍ25가 통일 전쟁이라는 그들의 말처럼/ 만에 하나라도 이 나라 붉게 물들었다면/ 나의 손자 우리의 손녀들이/ 이렇게 맑은 웃음 날릴 수 있었을까'라고 썼다.
장석주 시인의 시 '이병철'은 '차라리 혁명은 가난한 역사 속에서 솟구치는 것이다./ 가업(家業)은 창업 한 세기를 채우기도 전에/ 세계 기업사의 기적으로 우뚝 솟았다.'라고 삼성 창업주의 위업을 추켜세우면서도 과(過)는 거론하지 않았다.
개별 작품이 씌어진 후 시인협회 차원의 감수 과정은 따로 없었다. 신 회장은 "시를 쓰는 과정에서 논란의 인물을 지나치게 감싸 안았다고 해서 시를 없애거나 고치게 하지는 않았다"면서 "시는 전적으로 시인에게 맡겼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인협회의 이름으로 나온 시집인 만큼 비판을 면키는 어려울 듯하다. 한 젊은 시인은 "시인협회 시인상 1회 수상자였던 김수영이 지하에서 내가 왜 그 어용단체의 상을 받았을까 후회하며 울고 있을 것"이라면서 "시인협회가 시인들의 입을 빌어 정권에 구애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다. 그는 "안 그래도 시인협회가 노쇠해 젊은 시인들로부터 외면받아 왔는데, 시의 본령을 벗어난 이번 사태로 이런 현상이 가속화하지 않을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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