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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자 김종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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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자 김종률씨

입력
2013.05.12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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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영 등 작사 5·18 상징노래윤상원·박기순씨 영혼결혼식 후 10여명 모여 노래극 만들기로'임을 위한 행진곡' 그날밤 작곡■ 음악 좋아한 평범한 대학생대학가요제 2등 한 경영학도 5·18 직접 목격하고 음악 접어광고회사 거쳐 음반사 사장■ 박제된 역사를 넘어뮤지컬 컨셉앨범 외국서 호응… 글로벌 금융위기 닥치며 엎어져18일 음악회 계기로 재추진할 것

국가보훈처가 5.18광주민주화운동 33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공식주제가처럼 불려온 '임을 위한 행진곡'을 대체하는 노래를 제정하겠다는 움직임을 지난 7일 일단 철회했다. 그러나 이명박정부 이래 이 노래를 폄훼하려는 시도가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계속 이뤄져 온 터라 이 참에 이 노래를 5.18광주민주화운동 공식 주제가로 지정하라는 소리도 높다. 1982년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를 황석영 등이 공동개사하여 김종률이 작곡한 이 노래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유공자와 유족들의 모임에서 불려왔고 1997년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이 국가공식행사가 되면서는 공식주제가처럼 불리워왔다. 그러나 보훈처는 2010년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빼고 '방아타령'을 넣으려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고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부르게 하더니 2011년부터는 제창곡이던 이 노래를 합창곡으로 바꾸었다. 급기야 올해는 5·18민주화운동 공식 기념곡을 따로 지정하기 위한 예산까지 책정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재점화됐다. 다행히 여당의원들까지 '임을 위한 행진곡'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공식주제가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보훈처는 당초 계획을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5.18아카이브설립추진위원회'는 이 노래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겠다는 계획도 밝힌 상태이다. 1982년에 전남대 경영대 학생으로 이 곡을 작곡한 김종률(55 제이알미디어 대표)씨를 만났다.

- '임을 위한 행진곡'을 둘러싼 최근의 소동에 대해서 어떻게 보세요?

"광주의 분위기는 국가 기념식에서 부르자 말자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정하려는 움직임과 연관되어 있다고 여기시는 것 같아요. 이명박 대통령도 취임 첫 해에는 공식기념식에도 오셔서 노래 제창도 같이 했는데 그 다음해부터는 기념식에도 안 오셨고요. 저로서는 30년 동안 잘 불려온 노래를 제동을 걸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안타깝습니다. 노래를 통제하고 부르지 말라는 것은 요즘 시대하고도 맞지 않는 일이잖아요."

-이 노래는 언제 어떻게 작곡을 하셨나요?

"1982년 2월 20일인가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전남)도청에서 끝까지 지키다가 돌아가신 윤상원씨와 1979년에 노동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박기순씨의 영혼결혼식이 있었어요. 한 분은 민주화항쟁 과정에서 돌아가시고 한 분은 노동운동을 하시다 돌아가셨지만 두 분 다 전남대를 다니시고 노동야학을 함께 하면서 서로 알고 있던 사이라서 가족끼리도 아니까 젊은 아들 딸을 전통의 영혼결혼식을 시키자 그러셨다고 해요. 친지 가족만 망월동 묘지에 와서 진짜 결혼식처럼 이뤄졌다고 합니다. 그걸 광주에서 문화운동하는 이들이 뒤늦게 알고 당시 광주 문화운동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황석영씨 집에서 모여서 영혼결혼식도 결혼식인데 우리가 축하를 해야 하지 않겠나 그랬어요. 우리는 가진 것이 음악하고 문학이니까 이걸로 노래극 테이프를 만들자 이렇게 된 거예요. 10여명이 모여서 작곡은 제가 하기로 했어요. 창도 나오고 비나리도 나오고 꽹가리 징이 등장했고 양악기라고는 제가 들고간 기타 하나를 가지고 1박2일 녹음에 들어간 거지요. 그 당시는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우리가 합시다 하고는 바로 그날 모여서 전격적으로 한 거에요. 그때가 제 기억에는 82년 4월인데 어떤 분은 5월이라고도 해요. 노래극에 쓰인 곡은 모두 7곡인데 6곡은 제가 원래 작사 작곡해 놓은 것을 조금 바꾸기도 하면서 썼고 '임을 위한 행진곡'만은 바로 그날 밤에 작곡했어요. 영혼결혼식이 끝나고 두 분이 용기를 잃고 풀죽어 있는 후배들한테 부르는 노래로 나중에는 전체가 다 합창하는 노래라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노래의 앞부분 네 소절은 제가 82년 초부터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건데 그날 거기에 가사가 붙여지면서 나머지는 일사천리로 된 겁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산천은 안다로 할까, 운다로 할까 협의하는 가운데 저는 작곡을 하고. 제가 그렇게 재주 있는 사람이 아닌데 두 분에 대한 존경과 모든 분들의 희생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뭉쳐져서 폭발적인 곡이 만들어졌던 것 같아요. 분위기가 그때는 정말 절절했었죠. 2층 거실에서 조그만 카세트를 놓고 방음도 되고 보안도 되게 창문에는 군용담요를 막아놓고 아주 열악하게 작업을 했어요. 지금도 원본테이프를 들어보면 개짖는 소리도 들리고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도 들좆?"

-작곡을 따로 배웠습니까?

"다 독학이지요. 기타와 피아노도 독학으로 치고."

-대학 때는 전공이 경영학과에 대학가요제를 나갔으면 약간 날라리였다는 건가요?

"음악을 정말 좋아했어요. 대학교를 입학하고도 음대를 가려고 부모님 몰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성악레슨도 받았는데 강진군청에서 공무원을 하시던 아버님이 1학년때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음대 가는 것은 포기하는 대신 대학에서 기타치고 음악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어요. 당시에는 대학가요제가 아주 활발했어요. 광주에 VOC라고 전일방송이 있었어요. 거기서 전일가요제를 열었는데 1회 대회 대상곡이 김만준씨가 부른 '모모'였고 제가 78년도에 황순원씨 소설에서 따온 '소나기'라는 노래로 2회 대회 대상을 탔어요. 그리고 79년에 MBC대학가요제에 나가서 '영랑과 강진'으로 은상을 받았어요. 영랑선생처럼 제 고향도 강진이어서 중학교 2학년까지 강진의 넓은 평야와 탐진강이 흐르는 것을 보면서 살았어요. 집안이 아주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시골 살면 학교 다니면서 소 먹이고 농사일을 거드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거든요. 전일음악제 대상곡이나 대학가요제 곡도 인기는 별로 못 얻었습니다만 비평가들로부터 대단히 신선한 곡이다, 대학가요제다운 곡이다,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그 덕분에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지구레코드사에서 취입도 했습니다. 1980년 초에 개인독집 앨범을 하나 내고 광주의 노래하는 사람들하고 옴니버스 음반도 내고요. 그때는 집에 들어가면 늦은 저녁부터 새벽까지 작곡을 했어요. 곡이 잘 써져서 230곡을 작곡을 했어요."

-그런데 음악쪽으로 아예 나가지는 않았어요.

"음악을 해서 먹고 살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광고회사인 대홍기획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광주라는 것이 제게는 큰 충격이었어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며칠 새에 죽어가는데 내가 과연 음악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충격을 받았어요."

-80년 당시에 광주에 계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공수부대가 하도 무서워서 뒤쪽에 도망 많이 다녔고 밤에는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지하방에 숨어있었어요. 당시 자취집이 도청에서 500미터 정도 떨어진 동명동이었어요. 자취방에 숨어서 총소리도 들었고 사람들이 죽어서 상무대에 수십구가 관으로 덮여있는 것도 보고. 군인이 머리를 곤봉으로 내리쳐서 피가 터지는 광경들, 열심히 도망갔던 광경들, 아, 그때 정말 소름이 끼쳤어요. 제가 문화운동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니까 79년부터 80년까지 경찰서 정보과에 두 세번 불려간 적은 있지만 맞거나 고문 같은 걸 당한 적은 없었어요. 저는 음악을 좋아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는데 우리가 세금을 내서 우리를 지키라고 했던 군인들이 어떤 이유에서든 저렇게 시민을 죽도록 패야 되는가. 27일날 도청을 지키는 시민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군인들이 하는 소리가 다 들리잖아요. 자취집에 숨어있는데 엄청난 총소리와… 밤 10시가 되어서 방송이 나오더라고요. 이렇게 했다.(한숨) 그런 걸 겪고 나니까 노래를 못하겠더라고요. 82년 말에 군대를 갔어요. 84년에 제대를 하고 85년부터 직장생활을 했어요. 대홍기획에서 AE(광고기획)를 하면서 옥시라는 여드름약 광고도 하고 여자속옷 광고도 하고 제가 영어를 조금 잘한다고 인정을 받아서 칼스버그맥주 같은 외국계 기업 광고도 많이 맡았어요."

-그러다 다시 음악회사로 돌아왔네요.

"나산에서 영상음악본부가 생겨서 이사를 하다가 BMG라는 음반사 사장을 하고 다시 BMG가 소니뮤직하고 합병을 하면서 소니BMG의 공동사장을 했습니다. 2009년까지 14년간 일하면서 우리나라 가요도 일부 외국에 내보기도 했지요."

-82년에 만든 노래극은 그 후 공연한 적이 있습니까?

"제가 2008년에 이걸로 뮤지컬을 제작해서 30주년이 되는 2010년에 광주 도청앞 분수대에 오픈무대를 만들어서 공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어요. 문화로 승화가 되면 우리가 세상을 떠나도 작품은 남아있고 그런 비극 속에서도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이 있었다, 그런 비극이 와도 우리가 용기를 잃어서는 안된다, 우리 앞서 사람들이 이렇게 용기있게 싸웠으니까. 그런 걸 일러주고 싶은 거지요. 당시 노래극을 줄거리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포함해서 옛날에 작곡했던 노래를 손봐서 12곡을 담은 컨셉앨범을 만들었어요. 아시아 지역을 다닐 때마다 시놉시스 두 장과 함께 외국 반응을 살펴 보니까 굉장히 좋아요. 군사 정권에 저항해서 싸웠던 광주다, 외국에선 다 알고 있어요. 그걸 뮤지컬을 만든다니까 중국 일본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폴 인도네시아까지 저희 회사의 카운터파트인 사람들이 하나같이 '빨리 만들어서 해라' 그러는 거예요. 뮤지컬의 본고장인 뉴욕 브로드웨이에도 갈 수 있지 않나, 가야 한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국제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재정지원을 약覃杉?쪽에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지요. 오는 18일 5.18기념재단에 있는 민주홀에서 2013년 광주인권상 시상식을 하고 7시부터 기념음악회를 합니다. 거기서 뮤지컬을 준비하기 위해 만든 11곡 정도 다 부르려고 합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유행가 같기도 하고 좀 느낌이 달라요.

"보통 전통적인 행진곡은 장조의 밝은 곡으로 나가잖아요. 그런데 비장함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단조로 만들었습니다. 당시는 이런 생각 자체가 획기적이었던 거 같아요."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할 거라고 기대했어요?

"전혀. 저는 만들기만 했지 배포는 전혀 모르잖아요. 복사테이프를 몇 천개 만들어서 교회나 사회단체로 조심스레 나갔다는데 이게 카피에 카피를 거듭하며 몇 백만개는 만들어졌을 거예요. 제가 82년말에 군대를 갔는데 83년 봄에 첫 휴가를 나왔어요. 친구랑 연세대 정문 앞을 지나는데 귀에 익숙한 노래가 들려요. 친구가 '저게 요즘 학생들이 시위하면서 부르는 최고희트곡'이라면서 '너 가르쳐줄까'그러더니 막 불러요.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임은 윤상원씨와 박기순씨이지만 그 당시 역사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 지금도 몸 사리지 않고 싸우는 분들을 다 아울러서 통칭할 수 있겠지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느낌이 가슴에 오니까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불렸다고 생각합니다."

-대중들한테 인기를 끌면 원곡에서 가사나 그런 게 바뀌기도 하는데 안 바뀌었습니까?

"'깨어나서 외치는'으로 부르는데 원래는 '깨어나 소리치는'이고요. '앞서서 나가니'도 오리지널은 '앞서서 가나니'였습니다. 가사도 부르기 쉽게, 음도 약간은 편하게 바뀌었지만 그 외에는 바뀐 게 없어요."

-이 노래를 통해 바라는 게 있다면

"이 노래를 5.18기념식에 쓰면 왜 안되냐는 이유를 보니까 가사가 과격해서 쓰지 못한다 이런 말도 나와요. 이 노래 과격한 거 없어요. 정말 서정적인 노래입니다. 이 노래가 과격하다면 프랑스 국가 라마르세예즈를 들어야지요. 두번째는 일부 반정부 단체나 정부를 좋아하지 않는 단체들이 부르니까 안된다 이런 말도 들었어요. 그러면 애국가도 그런 사람들이 불렀다면 안 불러야 되는 겁니까? 이 노래는 단순히 노래만은 아닙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자체가 5.18 민주항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데 이 노래를 안 하려고 하는 것은 혹시 광주항쟁의 정신을 덮으려고 하는 것인가 그런 걱정을 광주분들은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는 절대로 안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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