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사태 직후의 일로 기억된다. 당시 나는 공정거래위원회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한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가 다니던 회사는 다국적기업에 인수되었고, 그는 이 다국적기업의 영업전무로 새로 임명된 상태였다. 그는 내게 "이쪽 업계 관계자들이 내가 새로 왔으니 한번 모임에 나오라고 하는데 가도 될까"라고 물어왔다. 나는 "그냥 인사하자는 것 같은데 상관없지 않을까"라고 답했지만, 그 친구는 영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는 다니는 다국적기업의 '공정거래 자율준수 매뉴얼'때문이었다. 그 친구가 팩스로 보내온 매뉴얼을 보는 순간, 나 역시도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매뉴얼은 공정거래관련 법 위반 시 벌금이나 회사 이미지 훼손 등 위험부담이 매우 큰 만큼 법 준수는 중요한 경영방침임을 선언하면서, ▦가급적 경쟁사업자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말 것 ▦참석하더라도 가격이나 생산량 등 얘기가 나오면 당장 '나는 지금 이 모임에 참석할 의사가 없다'고 밝힌 뒤 뛰쳐나오고 곧바로 바로 회사에 연락할 것 등 아주 구체적인 행동요령(code of conduct)을 담고 있었다. 국내엔 인식이 생소했지만, 담합이 얼마나 기업경영에 위협적인 것인지, 설령 실제 담합이 없었더라도 오해 살 만한 회동자체를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경영규범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바야흐로 준법경영의 시대다. 미국에선 이미 10여 년 전 엔론과 월드컴 분식회계사건을 통해 거대기업도 비윤리적 의사결정 한번으로 무참히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줬다. 게다가 세계경제가 개방화, 글로벌화되면서 법을 어기는 데 따른 피해는 더 이상 국내에만 머물지 않는다. 개별국가 안에서 일어난 위법행위일지라도,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라면 해당국 법이 적용되는 '역외적용'원칙이 공정거래법과 반부패방지법 분야에선 이미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기업이 그 동안 국제카르텔로 인해 미국, 유럽연합(EU) 등 외국 경쟁당국으로부터 부과 받은 과징금 및 벌금 액수는 총 2조4,000억원에 달하고 있다.
이제는 단순히 리스크 관리라는 소극적 측면이 아니라, 준법경영·윤리경영을 통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CSR) 확보가 기업경쟁력의 핵심요소가 되고 있다. 또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소비자와 종업원, 주주와 채권자, 주변 사회 등 이해관계자에 대한 건전한 책임을 다하는 것은 이제 기업의 생존을 위한 필수요건 즉 지속가능경영(sustainability)과도 직결되어 있는 문제라고 인식해야 된다.
2010년 11월 국제표준화기구(ISO)는 약 10년의 개발기간을 거쳐 사회적 책임의 국제표준인 ISO 26000을 발표하였다. 조직 거버넌스, 인권, 노동 관행, 환경, 공정 운영 관행, 소비자 이슈, 지역사회 참여와 개발 등 7개의 핵심주제를 다루면서 관련된 실행지침 및 권고사항 등을 포함하고 있다. 박근혜정부 140대 최종 국정과제에서는 빠졌지만, 국내에서도 작년 선거과정에서 경제민주화 관련 공약으로 윤리헌장 제정 의무화, ISO 26000 도입 장려 등이 제시된 적이 있다. 현재 세계적으로 1만개가 넘는 조직이 이 지침을 사용한다.
이젠 준법경영이 곧 돈이 되는 시대, 사회적 책무 다하는 기업이 장수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새로운 틀에서 생존하려면 경제주체들도 변화해야 한다.
특히 준법경영을 기업문화로 정착시키려는 기업인들의 강한 의지와 모범이 가장 중요하다. 또 소비자들이 자신의 지갑을 들고 기업들을 대상으로 투표하는, 윤리적 소비자로서 역할해야 한다. 정부나 정치권도 합법적인 권력의 행사를 부담으로 여기면서 예술처럼 섬세함과 정교함을 발휘하여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동규 김앤장법률사무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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