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인반신(半人半神)의 혜안으로 국가 경제발전을 이끌어 세계 10대 경제대국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졌다' 경북 구미시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인근에 서있는 금빛 동상의 건립취지문 일부다. 지난주 동상 앞에서 만난 이기수(81)씨는 대뜸 "키가 너무 커"라고 말했다. 경남 하동에서 노인회 일행 80여명과 관광버스를 타고 생가를 찾았다는 그는"6ㆍ25 끝나고 내가 5사단 열쇠부대에서 일등병으로 있을 때 사단장이 바로 박정희 장군"이라고 했다. 이제 허리가 굽은 옛 일등병은 "키는 똥자루만한 양반이 아주 야물었지"라며 옛 장군을 회고했다.
박정희 기념화 한창
구미역에서 '박정희로'를 달려 생가로 가는 동안 택시기사는 "박 대통령 생가는 작은 초가"라며 "김영삼 전 대통령 생가도 가봤는데 그쪽은 원래 부자라서 그런지 집이 좋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원형을 복원한 사랑채는 초가였고 1964년 개축한 안채도 흔히 볼 수 있는 단층 농가 모습이었다. 생가보존회 관계자는 초가 옆 감나무를 가리키며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심은 것으로 매년 30개 정도 감이 열리는데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주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사정이 다르다. 생가 아래 쪽에는 58억5,000만원을 들여 1월 완공한 업적 전시관 '민족중흥관'이 들어서 있었다. 또 생가와 300여m 떨어진 동상 주위에선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2015년까지 24만6,000㎡부지에 새마을운동 테마공원을 조성하는 이 공사의 사업비는 792억원에 달한다.
구미뿐이 아니다. 지난 대선 전후부터 박 전 대통령 기념사업은 더 확산ㆍ가속화하고 있다. 경북 문경시는 지난해 6월 박 전 대통령이 교사 시절 살았던 하숙집 '청운각'을 기념공원으로 조성했고, 경북 울릉군은 박 전 대통령이 울릉도를 방문했을 때 묵었던 옛 울릉군수 관사를 기념관으로 꾸미고 있다. 서울에서도 지난해 2월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ㆍ도서관 중 전시 시설이 공개됐고, 박 전 대통령이 5ㆍ16쿠데타 당시 살았던 중구 신당동 가옥도 기념공간으로 거듭날 예정이다. 지난해 11월 최민희(민주) 의원은 5년간 박 전 대통령을 기념하는 사업에 투입됐거나 투입이 확정된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이 1,270억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 220억원, 노무현 전 대통령 160억 2,000만원의 대여섯 배에 이르는 규모다.
보여지지 않은 것들
지난주 마포 박정희대통령기념ㆍ도서관에 들어서자 박 전 대통령의 대형 초상과 함께 해외 석학들의 찬사를 볼 수 있었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도 없다' '매우 창의적이고 능률적이었다'…. 이어'5ㆍ16혁명은 민족중흥과 근대화 혁명'이라는 코너가 나타났다. 이곳에서는 5ㆍ16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었다. '민주당 정권의 무능으로 혼란이 극도에 달하였으며… 당시의 모든 정세와 환경이 혁명이 생길 수 있는 요인을 유발함. 윤보선 대통령은 혁명 후 올 것이 온 것이라고 말함.'이어지는 전시시설은 고속도로 건설, 새마을운동, 중화학공업 육성 등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을 세세히 보여준다.
지난해 9월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는 "5ㆍ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하지만 전시시설은 5ㆍ16을 정당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혁당 사건 박 전 대통령의 과오는 아예 보여주지 않는다.
박정희를 '관광'하는 시선들
구미 생가 앞에서 만난 김모(74)씨는 "걔들 나한테 걸렸으면 그냥 안 뒀어. 그게 어떻게 예술이야"라며 지난달 모욕 논란을 일으킨 '박정희와 팝아트투어'를 격하게 비판했다. 당시 행사의 취지는 예술적 시각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을 다양하게 바라보자는 것이었다.
박 전 대통령을 똥자루라고 묘사한 할아버지처럼 기념시설에서 만난 이들은 이미 자기 나름대로 박 전 대통령을'관광'하고 있었다.
구미 생가나 마포 기념ㆍ도서관을 찾는 이들의 대부분은 관광버스를 타고 온 단체 관람객이다. 박정희 시대를 기억하는 노년층이 주를 이루는 이들은 추억을 얘기했다. 경남 김해에서 단체로 마포 기념ㆍ도서관을 찾은 김모(56ㆍ여)씨는 "그 시절 맹키로 다 만들어 놓으니까 좋네. 옛날에 자기가 다 한 거니까"라고 말했다. 서울에서 친목회 회원들과 구미 생가에 들른 정영배(67)씨는 "생가의 초가집을 보니까 그 시절 다들 그랬지만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를 했다는 걸 느꼈다"며 "정치를 잘못했다는 얘기를 할 수 있지만 우리를 잘 살게 해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고 했다.
드물지만 젊은 관람객들도 만날 수 있었다. 올해 연세대에 입학해 한국현대사 수업 과제로 마포 기념ㆍ도서관을 찾았다는 정모(19)군은 "제일 인상적인 것이 5ㆍ16을 혁명이라고 표현한 것"이라며 "학교에서는 군사정변이나 쿠데타라고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유신에 대한 설명도 별로 없고 안 좋은 부분은 빠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이 드신 박정희 세대는 모르겠지만 저희 세대쯤 되면 학교에서 배운 것도 있고 여기에 있는 것만 보고 판단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미술작가 오재우(31)씨는 마포 기념ㆍ도서관을 둘러보고 "전시 라인이 꼼꼼하게 굉장히 잘 돼 있다"며 "전시적인 면에서만 보면 웬만한 미술관 못지 않다"고 말했다.
구미 생가에 초등학교 4학년 아들과 1학년 딸을 데리고 온 주부 김모(38)씨는 "전시물이 업적만 강하게 표현을 해서 정치적으로 논란이 되는 부분은 아이들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린이와 체험학습을 하는 입장에서는 사실들은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옆에 있던 아들은 기억에 남는 게 뭐냐고 묻자 "우물에 있는 물펌프가 제일 재밌다"고 말했다.
교과서 속의 5·16 문민정부 이후 '군사정변'으로 MB정권 때 수정명령 등 논란류호성기자박근혜 정부의 조각 인사청문회 때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5ㆍ16이 군사정변이냐"는 질문에 "교과서에 기술된 것을 존중한다"면서도 "직답을 못하는 이유를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현재 고등학생들은 6종의 한국사 검정교과서를 통해 박정희 시대를 배운다. 이들 교과서는 2009년 마련된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 따라 5ㆍ16을 군사정변으로 표현하고 있다. 집필기준은'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5ㆍ16 군사정변을 일으켜 군사정부를 세웠음을 기술한다. 이후 두 차례 헌법 개정을 통하여 1인 장기집권 체제가 성립되었음을 다룬다'고 제시하고 있다.
5ㆍ16이 처음부터 교과서에 군사정변으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1964년부터 적용된 제2차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는 5ㆍ16을'박정희 장군의 영도아래 무혈혁명이 일어났다'고 서술했다. 유신헌법 제정 후 적용된 제3차 교육과정에서 교과서는'정부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달성하고자 헌법을 개정하고 유신을 단행하였다'는 내용을 담았다.
5ㆍ16이 군사정변으로 서술된 교과서가 등장한 것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1996년 제6차 교육과정때다. 2002년부터는 제7차 교육과정에 따라 국정 교과서 대신 다양한 검정 교과서가 사용됐다. 검정을 통과한 6종의 한국 근ㆍ현대사 교과서는 박 전 대통령을 '헌법 위에 존재하는 대통령'으로 기술하거나 '개발을 구실로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하여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했다'고 평가했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 보수 학계는 교과서가 '좌편향'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정부가 이에 호응해 일방적으로 교과서 수정명령을 내리고 교육과정 개편을 통해 서술기준을 완화해 여러 차례 논란이 빚어졌다.
류호성기자 r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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