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친 전후 美 현대사 배경 소설공산주의·전쟁 공포보다 개인들 사이 배신의 물결이 사회 휩쓴 것 생생히 그려
필립 로스의 는 제목이 암시하듯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쳤던 전후 미국의 현대사를 다룬 장편소설이다. 일단은 정치소설인 이 작품은 그러나 경직되고 교조적이기 십상인 이 시대를 노회하고 세련된 화술로 사뿐히 셰익스피어의 자장 아래 안착시킨다.
매년 노벨문학상 시즌이면 미국의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는 이 한 편의 소설을 문학이 다룰 수 있는 거의 모든 주제의 관현악으로 확장시켰다. 신념과 감정의 갈등, 분노의 심리ㆍ동력학, 결점과 매혹의 관계, 반유대주의를 신봉하는 유대인의 심리, 유년기의 피폐한 가정생활이 생애의 패턴을 규정하는 메커니즘 등 수많은 소주제들이 정교하고도 박력 있게 짜여져 있다. 그러나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은 배신과 복수의 비극이라는 셰익스피어적 주제다.
소설의 줄거리를 범박하게 요약하자면, 안락한 부르주아지와 사랑에 빠진 노동자 출신 공산주의자의 이야기다. 2m가 넘는 장대한 기골에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한 광산 노동자 출신의 아이라 린골드는 같은 노동자 출신의 참전 동지로부터 공산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는다. 종전 이후 레코드공장에서 노조 활동을 시작한 아이라는 우연히 노조의 연극에서 링컨 대통령의 역할을 맡으면서 유명 라디오 방송의 성우가 되고, 거짓말처럼 스타덤에 오른다. 소설은 강철맨 '아이런 린'이 지적이지만 나약하고, 아름답지만 속물적인 당대의 여배우 이브 프레임과 결혼한 후 겪게 되는 강렬하고도 참혹한 몰락의 연대기다.
소설은 소년시절 아이라를 통해 남자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작중 화자 네이선과 그의 학창시설 영어교사이자 아이라의 형이었던 90세 노인 머리 린골드가 나누는 대화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주지하다시피 매카시즘의 시대는 죄와 벌이라는 인간 윤리의 인과구조를 비열하게 역전시킨 광기의 시대였다. 죄가 있어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벌을 주기 위해 죄를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벌 주기에 이보다 좋은 시대는 없다.
노동해방의 뜨거운 신념과 열정을 가진 강철맨 아이라는 그러나 공산주의 사상에만 끌리는 게 아니었다. 그는 스무 개의 다른 방향에서 자신을 끌어당기는 그 모든 격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가정과 아이라는 부르주아 계급의 핵심을 탐냈다. 인간 존재의 방대한 모순을 증거하는 아이라는 '혁명을 일으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어하면서도 아름다운 여배우와 결혼하고, 새파랗게 젊은 정부와 놀아나고, 나이든 매춘부와 시간을 보내고, 가족을 이루기를 갈망하고, 연예산업 중심지의 으리으리한 저택과 외진 산골의 무산자 오두막을 오가며 생활하는 사람'이었다.
공산주의자와 여배우의 결혼이 인류 역사를 통해 내내 반복돼온 결혼제도의 내재적 모순으로 인해 파탄을 향해 달려갈 때, 여배우는 그 파탄의 주범으로 공산주의를 지목한다. 는 책을 출간, 아이라가 소련의 스파이 노릇을 하기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를 이용했다는 덤터기 씌움으로써 그의 정절을 심판한 것이다.
아이라의 형 머리에 따르면, 전후 십 년간 미국을 휩쓸었던 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도, 전쟁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었다. 그건 개인들 사이의 배신행위, 배신의 물결이었다. '이 나라에서 과거 어느 시대에 배신행위를 그렇게 감싸주고 보상해주었나? 그 시대에 배신은 미국인이면 아무데서나 저질러도 되는 위반, 용인된 위반이었네. 배신의 쾌감이 금지를 대신했을 뿐 아니라 배신을 저지르고도 도덕적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440쪽)
거짓말의 기술을 한껏 발휘한 여배우의 배신은 진실로 받아들여져 아이라는 사회에서 매장되고 심신이 망가져버린다. 가십의 가공할 위력 덕분이다. 작가는 머리의 입을 빌어 말한다. '난 매카시의 시대가 전후에 가십,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 민주공화국을 통합시키는 이념으로 끌어올려진 가십의 승리를 선포한 시대라고 생각하네. 우리는 가십을 믿노라. 가십이 복음이고 국교가 됐지.'(473쪽)
아이라의 가파른 삶은 '가정 결혼 가족 정부 간통 등 부르주아적인 그 모든 쓰레기들에 인생을 망쳐버린 비극'으로 전락한다. 이 전락의 과정에 거장은 휘황한 솜씨를 발휘한다. 각 인물의 심리와 개성을 두려울 정도로 예민하게 간파해내는 시선으로 저마다의 인물을, 속물에 악인일지라도, 상당한 혹은 어느 정도는 매혹적인 면모를 갖춘 인물들로 그려낸다. 작품 속 표현을 빌자면 소설은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야 남는 스토아철학의 단련된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삶의 격정과 그 이후의 고독이 극명한 대비의 정조로 흐르며 독자의 가슴을 곤두박질하게 한다. 거장의 작품을 읽는 수고롭지?흥분되는 경험을 선사하는, 드물게 만나는 책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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