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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에세이] 임서기(林棲期)의 루소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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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에세이] 임서기(林棲期)의 루소 놀이

입력
2013.05.10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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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남향으로 앉은 덕에 수연재(樹然齋)의 아침은 일찍 시작된다. 창밖으로 보이는 가야산의 자락들이 아침 햇살을 이고 지난 밤 어둠의 포근한 이불을 개며 하루를 시작한다. 부지런한 농부는 어제 갈아엎던 논밭의 남은 곳을 마저 갈기 시작한다. 밤새 흐르던 집 앞의 개울은 잠시 쉬어가려는 듯 조용하다. 커피를 내리자 작은 방에는 커피향이 가득하다. 덩달아 부지런해지는 아침이다.

25년은 배우고, 25년은 가르치고, 25년은 책 읽고 글 쓰며 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막상 실천으로 옮길 때 가장 두려웠던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도 생활의 변화도 아니었다. 삶의 단조로움을 아직은 팔팔한(?) 나이에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내심 걱정이었다. 해미에 내려와 마련한 작업실 수연재는 고작 실평수 8평 남짓한 원룸아파트이다. 한쪽 벽에 책, 맞은 편 벽엔 그림과 오디오, 그 사이의 책상(하루 세 번 식탁으로 변신하는), 그리고 입구의 싱크대가 전부인 좁은 공간이다. 그러나 내겐 전혀 좁지 않다. 오히려 불필요하게 에너지를 낭비할 공간이 없어서 농밀하게 하루를 쓸 수 있으니 오히려 다행이다.

벽에 시계를 걸어두었지만 별로 보는 일이 없다. 아침이면 소리 없이 햇살이 파고들고 새들과 개울이 조잘대는 소리와 부지런한 농부의 트랙터 소리가 나를 깨운다. 가벼운 차림으로 읍성에서 개심사로 넘어가는 아라메길을 한 시간 반쯤 오르내린다. 그 짧은 부재 중에 이미 햇살은 방의 절반쯤까지 제 경계선을 물렸다. 가볍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책상에 앉아 책 읽고 글 쓴다. 햇살이 베란다쯤으로 물러간 것을 보고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다시 작업. 해넘이쯤에는 맞은 편 가야산 자락이 황홀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해넘이는 마주보는 게 아니라 반대편에 앉아 놀을 품는 산자락이 뱉어내는 풍광으로 즐기는 게 제맛이라는 걸 여기 와서 누린다. 바지런히 몸 놀려 소박한 저녁을 마련해서 하루의 작업을 수행해준 몸에게 공양하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읍성 안을 조용히 걷는다. 어둠이 읍성을 완전히 덮으면 발 끝에 걸리는 낮은 인입등의 불빛이 하루의 작별을 예고한다. 다시 수연재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작업하는 동안 창밖의 어둠은 고속도로 진입로를 향해 사선으로 늘어선 가로등의 발그레한 불빛이 마치 내겐 등대처럼 보이게 한다.

해미에서의 삶이 주는 선물 가운데 하나는 바로 시계의 사슬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늘 밭게 살던 도회의 삶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그저 하루의 햇살의 방향과 세기로만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는 삶을 비로소 회복한 수연재는 삶의 불필요한 장식과 군더더기를 그저 보풀처럼 여기게 만들어준다. 도회의 삶에서는 그게 전부인 양 매달리며 헐떡이며 달리던 것들이 그저 사소하게 보일 뿐이다. 더 너른 집과 더 큰 자동차도 그저 보풀일 뿐인 것을. 더 빠른 도구를 이용해 시간을 벌었으면서도 정작 시간을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그 도구를 이용할 비용 마련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빼앗겨야 하는 삶이 주는 피로감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러나 나의 하루는 너무나 농밀해서 하루를 마감할 때쯤이면 스스로가 대견하다. 처음으로 시계의 구획틀에서 벗어난 셈이다.

힌두교에서는 50대를 임서기(林棲期)라고 한단다. 25세까지 부지런히 배우는 학습기와 50세까지 가사에 충실한 가주기(家住期)를 마치면 가정과 사회적 의무를 벗고 집을 떠나 가까운 숲에 간결한 공간을 마련하여 삶을 성찰하고 마무리하는 기간이란다. 내가 삶을 삼등분해서 살기로 마음먹은 게 30대였는데 그 때는 이 말을 몰랐다. 해미에 내려와서 이 말을 알았다. 그러니 지금 나는 임서기를 제대로 살고 있는 셈이다. 숲으로 들어가는 것은 삶의 원형성을 회복하고 성찰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온갖 군더더기 떨쳐내고 자연 속에서 삶을 성찰하고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계를 보지 않고 살면서 오히려 더 밀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임서기에 얻은 지혜이고 선물이다. 그것이 나의 루소 놀이이다. 굳이 숲으로 가지 않더라도 시계가 만들어낸 시간이 아니라 자연이 주는 시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누리는 맛과 내용이 달라지는 것을 확인하는 루소 놀이가 나는 참 좋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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