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 연구기관들이 정부 권고에도 중복ㆍ유사 연구개발(R&D)을 수행해 혈세 낭비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한 '부처ㆍ기관 간 칸막이 허물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9일 한국일보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기상청으로부터 받은 '풍력ㆍ태양광 자원지도 관련 조정회의 결과'에 따르면 국무총리실은 2009년 11월 기상청과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의 연구책임자들과 회의를 가진 뒤 기상청은 평균 풍속 등을 나타낸 기초 자원지도를, 에너지연은 발전량 중심의 응용 자원지도를 제작하라고 권고했다. 또 공동 연구를 통해 예산 절감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환경부에 속한 기상청과 당시 지식경제부 소속 에너지연이 풍력ㆍ태양광발전의 최적지를 찾기 위한 자원지도를 중복 개발하고 있는 것에 대해 총리실이 중재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두 기관은 사실상 같은 기능의 자원지도를 2009년과 2010년에 각각 공개한 뒤 2010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10억씩 들여 해상도를 높이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기상청 관계자조차 "두 기관의 풍력지도 모두 미국대기과학연구소의 수치예보모델을 바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매우 유사하다"고 인정할 정도지만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공동 연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중복 개발 논란에 대해 두 기관은 서로 "우리가 자원지도 개발의 적임자"라며 네 탓 공방을 벌이고 있다. 바른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민경찬 명예대표는 "유망 분야에 대한 부처 간 주도권 경쟁으로 벌어진 결과"라고 지적했다.
심지어 같은 기관 안에서도 중복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지난해 10월 발표한 '부처별 예산안 분석' 보고서에서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이 30억원을 투자해 올해부터 시작한 생활방사선 안전관리 체계 구축ㆍ운영 사업이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진행해 온 생활방사선 안전관리사업(올해 예산 34억9,000만원)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두 사업 모두 생활방사선 측정과 실태조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KINS는 원안위 산하 기관인데도 연구개발사업 조정이 되지 않은 것. 이에 대해 KINS 관계자는 "두 사업이 비슷하다면 기획재정부에서 예산을 줬겠냐"며 "앞으로도 생활방사선 사업은 계속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예산부터 따놓고 보자는 부처 이기주의와 중복 연구를 거르는 부족한 역량이 이 같은 문제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11년 3월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출범했으나 제자리를 잡기도 전에 정권이 바뀌면서 2년 만에 해체되는 바람에 국가예산과 역량 낭비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 관계자는 "미래창조과학부가 연구개발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았지만 일부 전문가와 공무원 중심의 평가시스템이 중복 연구를 거르는데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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