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책을 공부했던 독일 라이프치히는 헤르메스의 도시다. 헤르메스는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두 마리 뱀이 얽힌 지팡이를 들고, 여기저기 빠르게 옮겨다니며 중재를 하는 메신저이다. 상업의 신인 한편, 민첩한 술수를 쓰는 악동이기도 하다. 금속 중 유일한 액체로 빠르게 흐르는 수은, 즉 영어의 머큐리라는 이름처럼 사뿐하게 날아오르는 매끈한 모습으로 즐겨 형상화된다. 그런데 라이프치히의 헤르메스는 둔중하다 싶을 정도로 우람하고 근육이 발달한 모습이었다. 인쇄출판업이 발달한 이 도시에서 무거운 책들을 몸소 나르고 유통하며 인쇄기의 레버를 힘껏 누르는 육체 노동에 임하다보니, 결국 종이책의 단단한 물성이 그를 근육질 몸으로 거듭나게 한 셈이다.
2004년 한국의 TV 광고에 등장한 헤르메스가 아직도 생생하다.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네이버 지식검색 광고에 출현한 전지현씨는 두꺼운 책이 아닌 인터넷 정보의 흐름에 어울리는 날렵한 헤르메스였다. 내가 어린이였던 80년대에는 잡지나 라디오, TV 방송의 뒷편에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류의 코너가 있어서, 두꺼운 안경을 쓴 척척박사 할아버지나 미래의 꿈나무인 똘똘한 천재 과학자 어린이가 답을 설명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헤르메스로서 전지현은 지식을 연마하는 데에는 무심한 듯했다. 대신 그것을 속히 불러내는 요령을 보여주었다. 이 변화는 콘텐츠의 패권이 전문 지식 제공자로부터 이를 유통하는 플랫폼 제공자에게로 이동하리라는 미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지금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기기가 모바일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로 확장되고 있다. 미디어는 다변화되고 라이선스는 복잡해져간다. 이제 헤르메스는 믿음직한 일꾼의 육신도, 빠르게 이동하는 날렵한 체격도 벗어 던지고는, 술수를 부리며 변신 중인가보다. 수은처럼 형상을 가늠할 수가 없다. 신문을 참고하니, 경제면이나 IT면의 디지털 콘텐츠 소식에서는 소비자인 독자의 편의만 줄기차게 거론된다. 콘텐츠 전문가들은 생산보다는 소비자 분석에 주력하는 듯하다. 이에 대응하여, 사회면이나 오피니언면에서는 '디지털 콘텐츠는 무료'라는 사회적 인식을 경계하면서, 이는 지식의 질적 하락을 가져올 것임을 우려한다.
독자 입장에서 종이책이 주는 견고한 안정감은 차치하고라도, 나는 종이책을 만드는 즐거움이라던가, 한 권의 책이 가진 무게감과 촉감을 접촉하는 저자의 성취감이 거론되지 않는 점이 의아하다. 내게는 인터넷에 최적화된 형식으로 퍼블리싱되어 이미 많은 독자를 끈 웹툰의 작가들이 굳이 종이책의 형태로 작품을 다시 출간하는 심리와 이를 요구하는 출판 시장의 생리야말로 흥미로워 보인다. 종이책에서 디지털 콘텐츠로 이행을 다룬 온갖 담론들에서는 기술적 편의와 경제적 측면에 치중하느라, 콘텐츠의 본체를 다루는 생산자 및 제작자의 섬세하고 복잡다단한 입장과 환경, 처우를 간과한다. 나는 여전히 유효하게 꿈틀대는 이 지적이고 문화적인 에너지가, 재편되는 지식의 생태계 속에서 어떻게 전환될지가 궁금하다.
물론 콘텐츠 시장의 상업성은 중요하다. 구텐베르크의 본령 또한 상인이었다. 근대적 인쇄출판업은 그 태생부터 자본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었고, 인쇄된 서적이란 무엇보다도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는 상품이었다. 중세 필사본은 은둔의 수도원과 귀족의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했지만, 구텐베르크 이후 인쇄업은 베네치아, 리옹, 안트베르펜 등 상업과 금융, 무역의 도시를 중심으로 번창해갔다. 학문의 중심인 파리, 종교서 출판이 활발한 로마,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가 정착했던 바젤에서도 인간 정신의 찬란한 유산들이 인쇄기의 삐그덕거리는 소음 속에서 육신을 갖추고는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단, 이 역사 속의 한 교훈은, 콘텐츠의 생산이 지속력을 갖추지 못한 상업만의 도시에서는 변덕스러운 헤르메스를 제대로 잡아두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독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 있는 도시인 라이프치히는 학문과 상업이 동시에 발달한 책의 도시다. 콘텐츠의 생산력이 비옥한 그 토양에서 헤르메스는 책을 나르며 오래도록 머물렀다.
유지원 타이포그래피 저술가 ㆍ그래픽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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