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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천산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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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천산대학

입력
2013.05.08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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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은퇴를 하면 새로 입학하는 대학이 있다. 노인대학 그런 거냐구? 아니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하바드 등 세계 각지의 명문대학들이다. 대학 이름을 대볼까? 방콕대학은 방에만 콕 박혀 사는 사람들이 다니는 대학이다. 방글라데시대학도 있다. 방에서 구르고 뒹굴고 사는 사람들의 대학이다. 이런 대학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즐거움이 별로 없다. 친구도 물론 없지.

이 집 저 집 괜히 다니며 바장이는 이집트대학도 있다. 그래도 방콕대학 이런 것보다는 낫다. 하바드 대학은 ‘하는 일 없이 바깥으로 들락날락 하는 사람들의 대학’이다. 예일대학도 무시하면 안 되는 전통의 명문 아닌가. 예전에 내가 이런 일 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다니는 대학이니 고위 공직자들이 많고 수준이 아주 높다.

그런 대학에 다니는 사람들도 많지만, 산이라는 산은 죄다 섭렵하려는 등산 중독자들이 다니는 대학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천산대학은 천 개의 산을 오른 사람들의 대학이다. 한자로 千山이다.

천산대를 졸업하면 이천산 대학이 기다린다. 그걸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면 삼천산대학에 들어가지 않고는 못 배긴다. 역시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 그 다음 사천산, 오천산... 이렇게 이어지는 식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 만산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있을까? 찾아보면 어딘가 있기는 있겠지.

올해 일흔 살이 된 A씨는 10년 전 은퇴한 뒤부터 열심히 산에 다녔다. 월수금은 자기 혼자서, 화목토는 아내와 함께. 1주일 중에서 교회에 가는 일요일 하루만 쉬는 ‘산 미치광이’가 된 것이다. 그가 10년 동안 다닌 산이 3,300개라니 1년에 330개꼴이다. 열두 달 중에서 열한 달을 산에 다녔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의 강력한 주장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1만 8,000개의 산이 있고 서울에만도 150개의 산이 있다고 한다. 마음 같아서는 1만 8,000개의 산을 다 가보고 싶다는 사람이다. 그의 방에는 온통 산에 관한 자료밖에 없고 머릿속은 늘 산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아무리 낮은 산이라도 다 그 나름의 매력과 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한 달 쯤 전, 어느 산에 갔다가 내려오는데 한 발짝도 걸을 수 없을 만큼 전신에서 힘이 쭉 빠지고 어지러워 죽는 줄 알았다고 한다. 이러다가 한마디 말도 못하고 가는 게 아닌가. 가까스로 간신히 겨우 겨우 집에 도착한 그는 가까운 병원을 찾아가 진단을 받았다. 신체에 다른 이상은 없었지만 의사는 빈혈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늘 산에 다닐 때 간단한 간식 정도나 챙겨 먹고 보통 하루 10시간씩 걷곤 했다. 살도 좀 빼야겠다는 생각에서 아침에 빵 한 쪼가리만 먹고 집을 나선 뒤 산에서도 과일로 때우는 식의 등산을 줄곧 해왔다. 그는 술도 입에 대지 못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늘 혼자 다니니 이것저것 뭘 많이 먹는 일이 없었다.

어쨌거나 난생 처음 겪는 일에 적잖이 당황한 그는 지금 산에는 발을 끊고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중이다. 운동 과로, 등산 과로로 인해 온몸에서 진이 빠지고 기가 쇠한 터에 어딜 다니겠는가.

등산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무릎이 다 망가지고 그러다 보니 걷지 못하게 돼 결국 병석에 누워 있는 선배 생각도 나더란다. 이번의 빈혈은 건강을 장 챙기라는 ‘좋은 사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산에 열심히 다니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절대 무리해서는 안 된다. 천산대학을 너무 단기간에 졸업하려 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과욕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 무엇이든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고 하지 않던가. 극단적인 사례 하나 소개하자. 어느 고등학교 동문 등산모임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은 무릎이 좋지 않아 산에 오르지 않고 언제나 산 밑에서 친구들 짐을 지키던 총무였다고 한다.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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