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오늘은 어버이날] 9년 만에… 필리핀 부모 상봉 설레는꿈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오늘은 어버이날] 9년 만에… 필리핀 부모 상봉 설레는꿈

입력
2013.05.07 18:35
0 0

지난 2004년 8월 친구 소개로 만난 한국 남성과 결혼할 때 약약 마릴로우(37)씨의 눈에 가장 밟힌 것은 필리핀에 두고 온 부모였다. 파나이섬 서부 안티케 주의 산촌 마을에서 7남매를 키우느라 온갖 고생을 한 부모는 약약씨가 떠나던 날 눈시울을 붉히며 '어서 가라'는 듯 밭고랑처럼 주름 패인 손을 흔들었다. 매일 약약씨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부모의 마지막 모습이다.

낯선 한국에서 남편 정호석(49)씨와 1남 2녀를 낳아 키우는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정씨는 학교의 기능직 공무원으로 동료들에게도 인정받는 성실한 가장이지만 수입이 많지 않아 1인당 50만원이 넘게 드는 비행기를 타고 필리핀에 다녀오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올해는 꼭 고향에 간다'는 다짐을 골백번 하는 동안 흐른 세월이 벌써 9년. 약약씨는 "고향에는 사진기가 없어 한국으로 시집오면서도 부모님의 사진 한 장 챙기지 못했다"며 "매년 어버이날이 되면 더 그리워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7일 약약씨에게 꿈만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고향에 가고 싶어도 경제적인 이유로 갈 수 없던 결혼이민자들을 위해 대한적십자가 마련한 '다문화가정 모국방문 프로그램' 참여자로 선정된 것이다.

2010년 한국공항공사 후원으로 이 프로그램을 시작한 적십자사는 올해 약약씨를 포함해 필리핀 이민자 30가구, 베트남 이민자 45가구 등 총 75가구를 선정했다. 최근 2년간 모국 방문 경험이 없고 경제적으로는 어려워도 화목한 다문화가족들이다.

이날 서울 양천구 집 거실에서 약약씨는 부모를 만날 기쁨에 들떠 있었다. 항상 벽에 걸어 놓은 필리핀 지도 앞에서 아이들에게 고향 집 위치를 설명하는 동안에도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고향 집에 간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안티케 주는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을 간 뒤 다시 차로 3시간을 달려야 겨우 닿을 수 있는 곳. 통신시설이 잘 갖춰지지 않아 약약씨는 잠깐이나마 부모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전화가 연결될 때까지 무려 2~3일간 계속 전화를 걸어야 했다.

재작년 여름에는 아버지 약약 알떼묘(70)씨가 폐렴에 걸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한동안 전화가 연결되지 않아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2년 넘게 폐렴 투병 중인 아버지 걱정과 그리움에 눈앞이 캄캄해도 약약씨는 날로 커가는 아이들과 가정을 이끄느라 고생하는 남편 앞에서는 슬픔을 꾹꾹 참고 견뎠다.

그녀는 "부모님이 우리 아이들을 보면 너무 좋아하실 것 같다"며 "9년간 완성하지 못한 액자도 이제야 채울 수 있게 됐다"고 기뻐했다.

약약씨가 말한 액자는 거실 한 쪽에 걸려 있는 가족 사진이다. 정씨와 약약씨 부부, 천진하게 웃고 있는 세 아이들, 인자한 미소의 시부모 사진을 하나씩 모아 놓은 액자 한 쪽은 비어 있다. 약약씨는 이 빈자리에 자신의 부모 사진을 직접 찍어서 채울 생각이다.

안티케의 모든 가장들이 그랬듯 어린 시절 "대학은 가지 말고 빨리 돈을 벌어 오라"던 아버지였다. 밭에서 필리핀 고구마를 재배하고 소 한 마리 키우는 빈농의 아내인 어머니도 다르지 않았다. 약약씨는 "어릴 때는 부모님을 많이 원망했지만 내가 부모가 돼 아이를 직접 키워보니 가난했던 부모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며 "지금은 하루빨리 보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9년간 손 꼽아 기다려 온 고향으로 가는 비행은 이달 23일이다.

글·사진 김관진기자 spiri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