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북의 한 백화점 행사장을 찾은 30대 초반 여성인 A씨. 모 의류브랜드의 기획판매장에서 80여가지 제품을 고른 뒤 4시간 동안 입어보고 나서 2개를 구입해 수선을 맡겼다.
그런데 A씨는 수선한 제품이 나오자 처음에 고른 상품과 다르다며 거세게 항의를 했다. 결국 매장 직원이 사과하며 상품권을 주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A씨는 이런 수법으로 10여차례 상품권을 타냈다.
A씨는 쇼핑 후 주차장에서도 주차 안내사원의 수신호를 따르지 않고 차량 혼잡을 유발하고는 오히려 주차 안내사원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A씨는 여기 그치지 않고 피해보상을 요구하더니 급기야 해당 주차 안내사원의 퇴사를 요구했다. 해당 사원은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퇴사했다.
요즘 유통업계는 과도한 보상을 요구하는 블랙컨슈머와 전쟁을 벌이고 있다. 블랙컨슈머란 기업을 상대로 보상금을 노리고 상습적으로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소비자를 말한다. TV 코미디 프로그램 가운데 말도 되지 않는 주장과 함께 무조건 바꿔 달라고 떼를 쓰는 '정여사'와 같은 존재다.
최근 소비자 권익이 강화되고 인터넷 등이 발달하면서 이를 악용하는 블랙컨슈머들이 계속 늘고 있다. 특히 날마다 소비자를 상대하는 유통업계는 블랙컨슈머의 단골 표적이 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국내 기업 중 83%가 블랙컨슈머로부터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요구를 받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들은 더욱 심각해 33%가 블랙컨슈머 때문에 경영까지 지장을 받았다.
전화로 제품을 주문하고 택배로 물건을 배송하는 홈쇼핑 업체들도 상황이 심각하기는 마찬가지. 물건을 받아놓고 빈 상자만 왔다고 주장하는 경우는 물론 상담원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 업무를 방해하기도 한다.
남성인 C씨는 2003년부터 2010년까지 무려 1,000회에 걸쳐 팬티와 스타킹 구매를 빙자해 홈쇼핑업체인 GS샵의 전화 상담원을 희롱했다. C씨는 "남성용팬티도 분홍색으로 제작해달라. 꽃무늬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제의뿐 아니라 "지금 무슨 속옷을 입었냐. 속옷 색깔이 뭐냐?" 등 음담패설과 인격모독을 일삼았다. GS샵은 C씨와 거래를 중단했다.
이처럼 블랙컨슈머에 시달린 유통업체들은 대책 마련에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섰다. 블랙컨슈머 퇴치를 통해 감정 노동에 종사하는 직원과 선량한 대다수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현대백화점은 이달부터 고객이 결제를 마치면 상품 취급주의 정보를 담은 '상품안심카드'와 교환 기준을 명시한 '선물교환증'을 자동으로 출력해 준다. 블랙 컨슈머 가운데 상당수가 상품 취급주의 정보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한 조치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해 12월부터 '고객 불만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 전사원에게 블랙컨슈머 대응 요령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는 악성 소비자 판단기준과 형벌 기준 등이 들어 있다. 홈쇼핑업체인 GS샵은 영업방해, 금전 손실을 끼칠 경우 과거 주문이력과 고의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거래를 거절한다. 권태진 현대백화점 고객서비스팀장은 "유통업계도 무조건 '손님은 왕'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블랙컨슈머를 구별하는 대책을 적극 마련하고 있다"며 "소수의 블랙컨슈머 때문에 다수의 선량한 소비자들이 민원 처리 등에 장시간 기다리는 등 피해를 보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고은경기자 scoop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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