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뒷광대다. 무대미술가라고 하지 마라."
그는 기자에게 부탁했다.
제멋대로인 머리카락, 날카로운 눈매와 노동으로 단련된 근육질의 팔, 선명한 경상도 억양…. 역시 이병복(87)씨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펼쳐준 전시회'이병복, 3막 3장'에서도 그는 쉬지 않는다. 아르코미술관 제 1, 제2 전시장이 통째로 그의 작업실이다. 전시품들은 여전히 그의 손길을 바라는 자식들이다.
그는 척박한 우리 연극 현장에 최초로 무대미술, 무대의상이라는 개념을 정립한 선구자자다. 한지, 삼베, 탈, 인형 등을 써서 한국적 이미지를 무대에 형상화하는 독창적 예술세계를 개척했다. 이번 전시는 극단 자유의 대표이자 무대미술가로 잘 알려진 그의 삶과 작업세계를 조명하는 자리다. 극단 자유를 창단한 1966년 이래 한국의 제 1세대 무대미술가로서 공인, 이렇게 큰 마당까지 마련해 줬지만 휴식은 여전히 사치다.
"노추가 아니길 바라며 양해를 구한다."
급한 볼일을 두고 왔다는 듯 어정쩡한 자세로 기자에게 하는 말은 인사치레가 아니다. 가장 애착을 갖는 연극 '피의 결혼'의 마지막인 3막 2장을 이어 받은 이번 전시는 미상불 또 다른 무대 현장이기 때문이다. 여든 후반의 고령이지만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극단 자유의 전용 무대로 1969년 서울 명동에 연 '카페 테아트르'의 간판이 그때 모습 그대로 재현돼 복고의 멋을 물씬 풍긴다. 김영태 시인이 그린 '수업' '환도와 리스' '대머리 여가수' 등 연극의 추상화를 방불케 하는 포스터는 1969~1975년 문화의 향기로 가득차 있던 이 독특한 카페를 불러내기 족하다. 당시 신문 기사, 공연 신고서, 공연 정지 명령서, 이후의 서명 운동 등 각종 자료와 함께 메모지가 시선을 붙든다. 이제는 원로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된 평론가 구히서씨도, 배우 박정자씨도 대형 흑백 사진 안에서만은 영원한 청춘이다. '아카이브 : 기억의 잔상'이라는 제하로 전시 중인 제1 전시장의 풍경이다.
'3막 3장 : 삶은 연극보다 더 진한 연극이다'라는 부재를 단 제 2전시장에서는 그가 가장 아끼는 무대의상이 맨 앞에서 관람객들을 맞는다. '햄릿' 중 나온 무당의 옷이다. 물론 극단 자유식의 '햄릿'이다. 몇 겹으로 덧붙여 만든 삼베옷은 영락없는 상복으로, 무대에 자욱했을 죽음의 기운을 헤쳐 갔을 터. 함께 전시된 무대복 등 대소 도구에는 이 뒷광대가 지난 시절 붙들고 씨름한 시간이 담겨 있다. '무의자(無衣子)'라고 부르는, 그의 남양주 작업실을 본떠 만든 공간이다. 옛 인터뷰 자리에서 그는 작업실 이름에 대해 "벌거벗은 아들이란 뜻인데, 사실 굉장히 건방진, 철학적 얘기"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작업과 묘하게 겹친다.
"주머니 썰렁해 갈 곳도 없었던" 유학 시절, 연필로 그린 '자화상'(1957년)은 뭔가 불만에 가득 차 있다. 피난지 부산에서 만난 화가 권옥연씨와 결혼, 1961년까지 파리에서 의상과 조각을 공부했던 시절을 증언한다.
전시장 한 켠에는 이번 자리를 위해 준비한 108개의 종이 부처들이 올망졸망 앉아 오가는 관객들을 바라보고 있다. 무대 의상이 돼 주었던 한지가 그를 통해 수많은 동승으로 환생한 것이다. 그는 "한지에는 요상한 기운이 있다"고 말한다.
평소 무뚝뚝한 경상도 할매인 그가 이제는 더러 환하게 웃기도 한다. 그러나 햄릿보다 더 비극적이었던 어머니, 거트루드의 눈물을 잊지 못하는 것은 여전하다.
이번 전시를 위해 그가 직접 지은 시에서 걸어온 세월을 돌아보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끝이 없는 / 시작뿐인 일들 / 그렇게 가 버린 / 내 시간 내 공간 / …(중략)…하지만 거기엔 꿈이 있고 / 편안한 무심(無心)이 있어 살아낸 / 내 시간들 내 공간들"('뒷광대의 독백')"
전시는 6월 30일까지 한다.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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