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이 제작한 연극 '만선'은 무대 앞에서 뒤까지 놓인 커다란 길이 우선 시선을 압도한다. 천승세의 원작 소설을 무대화한 이 작품은 주최측이 내건 '한국 근대 리얼리즘적 접근의 부활'이라는 기치에 걸맞게 사실주의 미학에 충실하다. 리얼리즘 연극의 표본을 보는 것 같다. 지난 3월 러시아의 명연출가 레프 도진이 말리극단을 이끌고 내한, 체호프의 '세 자매'를 통해 리얼리즘 미학의 정수를 선보였던 기억이 절로 날 정도다.
모두 다섯 차례 독본과 수정 작업의 결과, 이 작품은 인간 군상에 대한 사실적 묘사의 모범적 작품이라는 시각 아래 '배우의 연극'으로 정리됐다. 연출을 맡은 김종석은 "리얼리즘의 핵심은 (메커니즘이 아닌) 배우의 힘"이라며 "대학로 일급 배우들의 하모니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해안 작은 섬에서 선주의 황포를 감내해 가며 고기를 잡아 연명하는 가난한 주민들의 이야기다. 폭풍우 속 출항에 마지막 기대를 갖고 있던 곰치는 결국 참담한 몰골로 귀환하는데 아내는 실성하고 빚의 대가로 엉뚱한 데 시집 갈 처지의 딸은 자살한다. 한두 번 본 듯한 지난 시절 적빈의, 어찌 보면 시효 만료된 이야기다.
그러나 무대가 살아 있는 것은 배우의 힘 때문이다. 어민의 일상이 무대에 현존한다. 한명구(곰치)는 "절망에 사로잡힌 고집스런 인간이지만 가족과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인간으로 그렸다"고, 부인으로 나오는 김금숙(구포댁)은 "인물이 텍스트에서 가진 힘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고 말했다. 충청도 서해안 지방의 말투로 가감 없이 표출되는 지난 시절 적빈의 양상이 오늘의 이야기나 다름 없는 것이다. 15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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