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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당신은‘갑’인가, ‘을’인가

입력
2013.05.07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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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현 논설위원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어느 하청업체 사장이 외국에 다녀오면서 선물용으로 고급 양주 한 병을 사왔다. 그는 그것을 대기업 간부에 주었다. 그러자 그 간부는 정부의 한 고위 관리에게 주었고, 다음에는 언론사 간부가 받았다. 그 역시 그것을 아이의 학교 선생님에게 선물했다. 결국 양주는 선생님의 아들 과외를 맡은 대학생이 친구들과 마셨다는 것이다.

이 돌고 도는 양주 이야기는 우리사회의 ‘갑을(甲乙)문화’의 풍자이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는 ‘갑’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을’이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항상 ‘갑’으로만 살 수 없다. 그래서 더욱 잠시라도 ‘갑’됐을 때만이라도 마음껏 그것을 누려는 보려는 것일까. 아니면 ‘을’이었을 때 그만큼 당했으니 나도 당당하게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것인가.

대기업 상무가 기내에서 여승무원에게 행패를 부리고, 제빵회사 회장이 호텔 주차직원의 얼굴을 지갑으로 때리고, 유제품회사 영업사원이 대리점 주인을 협박하고 제품을 강매한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우리의 비뚤어진 갑을문화에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그만큼 ‘을’로서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결코 단순히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약자 편에 서는 ‘언더도그마’현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직장인 80%가 자신을‘을’로 생각하고 있는 나라이다.

갑과 을은 원래 계약 편의상의 대리명(代理名)일 뿐이다. 주종(主從)이나 우열(優劣), 높낮이가 아니라 수평적 나열이다. 계약에 따라 권리와 의무를 행하고, 위반하면 책임을 지면 된다. 그러나 권력과 계급과 돈을 가진 갑이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도를 넘은 횡포를 부리기 때문에 ‘을’이 서럽고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을’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친다. ‘을’로 살수록 내 자식만은 ‘갑’으로 살게 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 한다.

우리사회의 천박한 갑을문화는 경제분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공직, 스포츠, 학교, 문화예술 할 것이 없이 곳곳에 뿌리 박혀있다. 오죽하면 박근혜 대통령이 공무원들을 향해 ‘갑’의 태도부터 버리라고 일갈했을까. 교수가 제자를 종 부리듯 하는 일도 관행이 되어 있고, 노예계약에 시달리다 못한 연예인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자살까지 하는 세상이다.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오랜 시간 반복되고, 확장되어야만 문화가 된다. 유교적 계급문화의 유산도 아니다. 유교는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를 탓하는 것도 비겁하다.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총체적 모순이 결합되어 있다. 때문에 법과 제도를 강화하고, 관련자를 벌하고, 해당 기업을 혼내고, 갑과 을이 공정한 표준계약서를 의무화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의식의 전환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 또한 중요한 민주화이다. 이번에 불거진 사건들이 계기가 되어야 한다.

승자독식주의가 활개를 치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없고,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회에서는 지나친 서비스도 오히려 독이다. ‘갑’의 횡포만 더 부추기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익만을 위해 ‘을’인 근로자에게 또 다른 ‘을’을 강요하는 기업도 없어져야 한다. 감정노동자란 말도 억지다. 그들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지 인격적 모욕까지 참으면서 웃음을 파는 로봇이 아니다. 서비스의 아름다움과 가치까지 망가뜨리는 일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강요된 서비스는 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측은하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상대편의 입장이나 처지가 되어보면 그 심정을 안다고 한다. 이후의 모습은 둘 중 하나다. 군대에서 고참에게 혹독하게 당한 신병이 고참이 됐을 때,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과거 고참과 똑같이 후배를 괴롭히거나, 정반대로 후배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으로 바뀌거나. 갑을관계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사회에는 앞의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은 ‘갑’인가, ‘을’인가. ‘갑’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고 있나.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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