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교정은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전투경찰이 교내까지 들어와 무자비하게 시위를 진압했다. 당시 가장 많이 불렸던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이 노래는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희생된 영령들에게 바치는 추모곡이다. 그해 5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학에 들어와 처음 알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노래가 만들어진 사연을 안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여러 해가 지나서다. 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1982년 2월, 광주 망월동묘지에서 영혼결혼식이 열렸다. 신랑은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 숨진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신부는 그의 들불야학 동지로 1979년 세상을 떠난 박기순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해 3월 두 사람을 기리는 노래로 만들어졌다. 광주의 단칸방에서 창에 담요를 쳐서 가리고 몰래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는 수없이 복제되어 전국에 퍼졌고, 이후 민주화운동 현장 어디서나 빠짐없이 불리며 산 자들의 양심을 울렸다.
앞서서 나간 이들의 희생 덕분에 폭도들의 반란으로 매도됐던 5월 광주는 명예를 회복했다. 5ㆍ18은 1997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됐고, 금지곡이던 '임을 위한 행진곡'도 복권되어 매년 기념식에서 추모곡으로 불렸다.
그런데 이제 와서 부르지 말란다.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2일 광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올해 5ㆍ18 기념식은 예년과 같은 방향으로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예년처럼'이란 참석자 전원이 부르는 제창이 아니라 공연단의 합창으로 하겠다는 말이다. 부르지 말고 듣기만 하라는 말이다.
제창은 안 되는 이유로 박 처장은 "5ㆍ18 기념식은 광주 시민만의 행사가 아니라 정부의 기념 행사이므로 국민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고 말했지만 군색한 핑계일 뿐이다. 이 노래는 광주만의 것이 아니라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기록은 2011년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한국 현대사의 자랑스런 투쟁을 기억하는 소중한 무형유산이지, 5ㆍ18 기념식에서 축소하거나 추방할 대상이 아니다.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를 비롯한 시민 사회의 반발에도 아랑곳 없이 보훈처는 5ㆍ18 공식 기념곡을 따로 제정하려고 한다. 2006년, 2009년 두 차례 시도했다가 여론에 막혀 무산된 것을 올해 다시 4,800만원의 예산을 편성해 추진 중이다.
이 와중에 서울지방보훈청은 올해 5ㆍ18 민중항쟁 서울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청소년 공모전 수상작의 교체를 요구해 물의를 빚고 있다. 군인이 쏜 총에 맞아 피 흘리는 시민 모습이 들어간 그림과, '피 냄새' '총성'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시를 문제 삼았다. 지난해에는 초등학생이 쓴 수상작 시 '29만원 할아버지'를 문제 삼았었다.
왜 굳이 제창을 막고 기념곡을 따로 제정하려 하는가. 5ㆍ18을 묘사하는 작품을 왜 꺼리는가. 노래가 두려운가. 5ㆍ18이 두려운가. 누가 왜 두려워하는가. '깨어나서 외치는 함성'이, 역사가, 정의가 두려운 게 아니라면 그럴 이유가 있을까.
이명박 정부는 5ㆍ18 기념식에서 이 노래를 추방하려고 했다. 2009년과 2010년 공식 식순이 아닌 식전 행사로, 2011년과 2012년에는 합창단의 기념 공연으로 넣어 자리를 축소했다. 2010년에는 이 노래 대신 흥겨운 '방아타령'을 연주하려다 빈축을 사기도 했다.
시민단체와 야당 의원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추모곡으로 지정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5ㆍ18 유족들은 이 노래를 제창하지 않는 기념식에는 불참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열흘 뒤면 5ㆍ18이다. 영령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서야 할 때다.
오미환 문화부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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